◎정부 보유달러 14개사에 특혜불하/배정불로 비료·양곡수입 5배 폭리/이익금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제공/국회서 뒤늦게 정치문제화… 결과는 “흐지부지”「정부는 농사철을 앞두고 비료와 식량을 긴급 도입하기 위해 중석불과 정부 보유불 4백70만달러를 민간상사에 불하했다. 국무회의는 이 외화로 비료,양곡을 도입하여 농림부가 지정하는 가격으로 지정된 지역의 농민과 노무자들에게 배급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업자는 도입물자를 임의로 시중에 유출시켜 엄청난 폭리를 본 것인 바 이는 폭리체취령(군정법령 제19호)과 양곡관리법 위반이므로 미진상사 이연재,남선무역 김원규,영동기업 최점석,신한기업 강한욱 등을 기소했다. 이에 대해서는 공개재판이 있을 것이다.
1952년 7월,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어 소강상태를 보이던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서상권의 중석불 사건에 대한 발표문중 일부다.
중석불 사건이란 정부의 비호아래 기업인들이 중석불로 양곡을 사들여 엄청난 폭리를 취했던 사건이다. 중석불은 당시 수출주종품이었던 중석을 팔아 벌어들인 달러로 이 돈은 기계류 선박 화물자동차 등 산업부흥자재를 수입하는데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비료와 양곡을 수입해다가 떼돈을 벌었던 것이다.
당시 기업인들에게 달러 배정은 돈방석을 의미했기 때문에 정치권에 줄을 대어 달러를 따내려고 난리였다. 정치권이 이틈을 놓칠리 없었다. 더욱이 52년 당시에는 이승만대통령을 재선시키려는 움직임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고,대통령을 재선시키자니 돈이 필요했다. 자금을 확보하려는 정부의 움직임도 내밀했다. 돈줄을 쥐고 있는 재무부의 고민은 더욱 컸다. 재무부는 기업인들이 넘보는 중석불에 생각이 미쳤으나 중석불의 사용에 관한 규정이 문제였다. 그래서 51년 12월15일 은행 보유불 사용은 액수의 다과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인가하도록 새 규정을 만들었다. 산업부흥자재의 수입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된 중석불도 대통령의 인가만 있으면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이번에는 중석불을 풀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중석불을 벌어들이려면 중석을 많이 캐야 한다. 중석을 캐내려면 노무자들이 잘 먹어야 한다」 기막힌 발상이었다. 중석불로 양곡을 도입할 수 있는 명분이 선 것이다.
52년 3월부터 양곡 도입에 중석불이 풀리기 시작했다. 처음 대한중석에 배정되기 시작한 중석불은 특정상사를 대상으로 풀려 나갔다. 불하대상 기업은 당연히 정치권과 연결돼 있었다. 기업인은 정부가 배정한 달러로 돈을 벌고 정치권은 이들로부터 일정금액을 정치자금으로 받았다.
담당창구원도 모르는 사이에 중석불은 미진상사,남선물산,영동기업,신한산업 등 14개 상사에 3백50만달러가 배정됐고 삼호무역,경북과물조합 등 10여개사에는 정부보유불 1백20만달러가 배정됐다.
중석불을 불하받은 무역상사들은 미국과 일본에서 사들인 밀가루 한 부대에 3만∼4만환씩의 폭리를 취했다. 무역업자들은 시중 시세로 1만2천대 1이던 달러를 6천대 1의 공정환율로 불하받은 뒤 공시가격에 판매토록 돼 있는 비료와 양곡을 자유롭게 판매하면서 이중의 폭리를 취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업자들은 5배 이상의 장사를 했다. 당시 직접 관계했던 업자들은 총 44억환의 이득을 봤다고 했으나 일반인들의 추산은 2백억환이었다. 52년 2월15일 구정 다음날을 기해 통화개혁이 단행돼 1백원이 1환으로 평가절하됐으나 2백억환이면 2조원이었다.
국회는 뒤늦게 중석불 배정에 따른 흑막을 알아채고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내막을 파헤치겠다고 나섰다. 야당은 대대적인 정치공세를 폈으나 한통속이었던 정부와 검찰앞에 무역업자들이 5백억환의 부당폭리를 취했다는 사실만 겨우 공표하는데 그쳤다. 정치사건이 시원스럽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 당시 정부는 식량난에 시달리는 농촌을 위해 불하된 중석불을 정치사건으로 문제삼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재무부장관 백두진은 이렇게 해명했다. 『51년에는 가뭄이 심했다. 52년에 접어들자 가뭄의 여파는 식량난으로 연결됐다. 비료도 없었다. 그때 대한중석에 중석 판 돈이 있었으므로 국무회의에서 이 돈을 업자들에게 불하하여 비료와 양곡을 사오도록 했다. 공정환율과 실제환율의 차이를 감안하여 농림부장관에게 중석불로 들여온 비료와 양곡은 협정가격을 매겨 팔도록 하라는 공문을 띄웠으나 중간상인들이 이를 지키지 않고 폭리를 취했다. 중석불 사건은 별 것도 아닌데 정치문제화되어 세상에 큰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검찰에서도 흐지부지됐고 힘없는 농림부만 장관과 차관,양정국장이 사임했다. 정치권과 결탁했던 무역업자들도 된서리를 맞고 재계 뒤편으로 사라졌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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