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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BBC 「피의 일요일」 진상추적(특파원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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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BBC 「피의 일요일」 진상추적(특파원 리포트)

입력
1992.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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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북아일랜드 독립시위때 누가 총 쐈나”/“군행동 잘못” 당시 진압장교 증언공개/20년만에 “무장시민 공격은 조작”폭로【런던=원인성특파원】 1972년 1월30일 일요일. 북아일랜드의 런던 테리시.영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수많은 시민들은 영국정부의 불허 방침에도 불구하고 평화행진을 시작했다. 시내중심가로 진입하려던 시민들은 저지하는 진압군과 돌과 최루탄을 주고 받는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군인들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오 4시가 조금 넘어 총성이 울렸다. 시위대중 13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영국은 물론 세계를 경악케했던 「피의 일요일」 이후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피의 일요일은 많은 영국인들에게 이미 잊혀졌거나 젊은 세대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으로 묻혀져 가고있다.

하지만 당시의 희생자 가족과 친지들,그리고 독립을 강렬하게 원하는 일부 북아일랜드인들에게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비극으로 남아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은지 무려 20년이 지났지만 놀랍게도 이 사건의 진상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편이다. 사건 직후 영국정부 조사단은 시위군중쪽에서 먼저 총성이 울렸으며 이들 시민들속에 섞여있던 IRA(아일랜드 공화국)요원들의 공격으로 생각했다는 군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진압에 참여했던 군인들이나 지휘부,상급책임자중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희생자들은 아직도 폭력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상사를 입은 사람들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공영방송인 BBC텔레비전은 피의 일요일 20주년을 맞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기획프로그램을 제작,지난달 29일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군장교와 시민들의 증언을 모아 의문점들을 나름대로 추적했다. 논란의 초점은 당시 시민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시민들이 무기를 갖고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는 군의 총격으로 숨진 17세 소년 게리 도나히의 주머니에서 발견됐다는 4개의 수제폭탄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그러나 총에 맞은 도나히의 시신을 가장 먼저 근처의 민가로 옮기고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던 시민들은 그의 몸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익명의 당시 진압군장교도 시위대속에서 무장한 사람이나 총기,수제폭탄중 어느 것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시민들이 무기를 소지했던 폭도이며 군의 총기사용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주장하기 위해 나중에 누군가가 숨진 도나히의 주머니에 수제폭탄을 집어 넣은 것 같다는게 BBC취재진의 추론이었다.

익명의 이 장교는 당시 군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시인하고 무고하게 숨져간 희생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당시 진압군의 지휘부에 속해있던 데렉 윌포드 예비역 중령도 같은 심정을 피력했다. 20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증언에 나선 그는 피의 일요일 사건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식속에 자리잡고 괴롭혀 온 문제였다고 고백했다.

윌포드는 또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의 일요일이 남긴 것은 비극뿐이다. 그것은 문제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이제는 모두가 문제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북아일랜드인들이 영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 결과로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이 통일이 된다면 영국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는한 「피의 일요일」과 같은 비극은 앞으로 20년,40년이 지나도 계속될 것이다.

피의 일요일이 남긴 상처나 복잡하게 꼬여있는 북아일랜드 문제가 윌포드의 말처럼 단순하게 풀어질 것 같지는 않다. 가해자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죄책감보다 피해 당사자들이 겪은 고통은 훨씬 더 깊기 때문이다. 17세로 숨져간 도나히와 함께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6명의 친구들은 그뒤 하나같이 IRA에 가입해 무장투쟁을 벌였고 모두가 옥살이를 했다.

도나히의 가장 친한 친구로 테니스라고만 밝힌채 BBC인터뷰에 응한 한 청년은 7명의 영국군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16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3년전에 만기출소한 그는 방송에서 『피의 일요일이후 나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양심의 벽이 무너지고 말았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분노를 나타냈다.

희생자들이 편안하게 잠들고 유가족들이 진정한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로운 판단이 있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한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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