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가 세운 첫 신식학교/이승만등 배출… 스포츠 명문/고종이 명명·현판하사… 주차장등 들어서덕수궁이 내려다보이고 대법원과 길하나 사이인 중구 정동 34번지 「배재학당」 자리에는 미국계 은행빌딩이 들어서고 운동장과 교정일부는 유료주차장으로 변했다.
특히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붉은 벽돌건물의 동관 등 옛 교사 4개동과 강당은 「아펜젤러관」 「주시경관」 「우남학관」 등의 현판이 무색하게 2백여개의 무역회사 출판사 등이 들어서 칸막이를 하고 사무실로 쓰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학교였던 배재의 건학이념과 전통을 말해주는 「신교육의 발상지」 「신문화의 요람지」라고 앞뒤로 새겨진 대형 화강암 표석만이 주차장의 매연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 안쓰럽다.
교정 어느 곳에서도 이 학교출신 우남 이승만과 주시경,김소월,나도향의 족적을 더듬을 수 없다.
배제학당은 미국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8월3일 정동언덕에 단 2명의 댕기머리 학생에게 천자문 대신 알파벳과 세계사,물리 등 신학문을 가르치면서 세워졌다.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배재학당의 이름은 고종이 직접지어 당대의 명필 정학교에게 현판을 쓰게해 하사했다.
배재학당→배재고등학당→배재고등보통학교→배재중고로 이어지던 정동시대는 지난 84년 2월 배재 1세기를 1년 남기고 마감했다.
배재는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해 간뒤 개교 1백주년인 85년 4월7일 1백62명 교직원의 이름을 돌에 새겨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욕위대자 당위인역)는 대형 교훈비를 세웠다.
한국 최초의 난방식 건물이었던 동관은 정동교정에 두고 서관을 헐어 붉은 벽돌을 그대로 고덕동 교정으로 옮겨와 복원한 뒤 박물관겸 아펜젤러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의 현판과 1889년 배재학당 인쇄소에서 만든 「천로역정」 목각판 60여개가 소장돼 있다.
배재가 새보금자리를 찾아 떠나자 「개화 1번지」로,일제때는 「만세교」로 불렸던 정동교정은 급변했다.
서울도심의 마지막 노른자위 땅으로 불린 7천9백28평의 학교부지중 운동장 4천7백평은 코오롱건설에 77억원에 팔리고 나머지는 학교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코오롱측은 이 일대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고층빌딩 신축이 어렵자 체이스 맨허턴은행과 토지개발공사에 나누어 되팔았다.
토개공이 소유한 2천3백98평은 주차장으로 임대됐다.
배재는 럭비축구 등 스포츠명문교로도 빛나는 전통을 갖고 있다.
배재출신 운동선수들은 현재 주차장 구석에 있는 수령 8백년의 회화나무를 잊지 못한다.
하와이에서 우남이 운명한 날 멀쩡하던 큰 가지하나가 부러졌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이 나무의 그늘은 여름철 선수들의 유일한 휴식처였다.
배재럭비 OB구락부 회장 백승일씨(54·상명여대 교수)는 『고목의 그림자가 법원건물담까지 늘어져야 그날의 연습이 끝이 났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럭비선수였던 김종렬 대한체육회장(75)은 『일본인이 반이상이던 경성사범과의 경기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의 심정으로 싸웠다』며 『고덕동 새교정의 후배들도 배재정신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재는 1백7년의 연륜만큼 졸업생도 많아 5만여명을 헤아린다.
동창회를 주축으로 정동에 학풍과 전통의 맥을 잇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총동창회장 맹원기씨(57·39회 제3석유대표)는 『옛 교정 일부를 다시 사들여 배재문화센터를 건립하는 일을 적극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배재학당의 터전은 허물어졌지만 「빛나라 배재학당 흘러간 저 한세기 신문화의 요람터다… 맹호의 기백은 배재의 기상」으로 이어지는 배재찬가는 오늘도 고덕동캠퍼스에 울려퍼지고 있다.<이태희기자>이태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