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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김선풍교수 20년대 사진집·엽서 공개(화제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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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김선풍교수 20년대 사진집·엽서 공개(화제추적)

입력
1992.0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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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 대명사… 평양기생 모습 첫선/쪽진머리 엷은미소… 자태 한눈에/웅장한 기성천번 당시 영화 반영/서양문화 첨단 수용… 짧은 스커트에 발레도평양기생의 잔영이 담긴 사진집과 관광엽서가 한 민속학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금서기화의 풍류를 갖춘 전통기생들의 마지막 세대라고나 할 1910∼20년대 기생들의 모습은 애잔한 동경과 함께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중앙대 국문학과 김선풍교수(52)가 소장하고 있는 「기성기생사진집」과 14장이 한묶음인 관광엽서는 색향으로 유명했던 기성(평양의 옛 이름)의 여인들을 다각도로 소개하고 있다. 뭇 한량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을 이 사진집과 엽서의 주인공들은 이제 모두 고인이 됐지만 빛바랜 사진은 당시의 마지막 영화를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다.

▷사진집◁

주식회사 기성권번이 일종의 기업홍보책자로 발행한 사진집은 4·6배판 크기 32쪽으로 소속기생 84명의 타원형 흑백사진 22쪽과 이들이 불려다녔던 대형 요리집,기성권번 정경 등으로 구성돼 있다.

쪽진 머리에 가르마를 탄 기생들은 다소곳이 한복을 입고 엷은 미소를 띤채 평양기생의 명성에 걸맞게 우아한 모습으로 남성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곳의 기생들은 명기로 이름을 떨쳐 경성부로 스카우트 되거나 일본인 또는 부유한 조선사람의 소실로 들어앉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권두에 실려있는 웅장한 기성권번 건물의 모습은 당시 기생집이 얼마나 호황을 누렸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높은 축대위에 세워진 한양절충식 3층 벽돌건물에는 손님을 맞는 별실과 서화·무용·창 등을 가르치는 교습실이 자리잡고 있다.

권번측은 이곳이 평양의 명소임을 강조하기 위해 평양 명물인 을미대 현무문 부벽루 등의 사진도 함께 실었다.

건물안의 서화실에서 3명의 기생이 나란히 앉아 사군자를 배우는 장면이나 「김화선」이라는 낙관이 찍힌 대나무와 난초그림 2점 등은 평양 기생들이 교양과 기예를 갖춘 문화집단임을 과시하고 있다.

전화번호와 함께 사진이 게재된 조선요리 장춘관 동일관,서양요리 무장야 등의 대형 요리집은 자신들의 업소를 이용해준 기생과 권번에 사례하고 이 사진집을 보는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 광고료조로 사진집제작에 협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광엽서◁

일본 대정(TAISHO)사의 상표가 찍힌 관광엽서는 가로 14㎝,세로 9㎝ 크기로 평양 기생학교를 소개하고 있다.

주로 조선에 온 일본관광객에게 팔려고 만든 엽서에는 기생학교 전경과 학생들이 서화와 음악·무용 등을 배우는 장면이 담겨있다.

엽서 상단에는 영어와 일본어로 각각 「Chosen Dancing Girl's School」 평양기생학교라고 표기돼 있는데 기생후보생들이 전통기예 뿐만 아니라 서양음악과 무용·일본어도 배웠음을 보여준다.

칠판앞에 앉아 일본어를 배우고 있는 모습,퇴기의 지도아래 정성껏 서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 등은 진지하다.

이밖에 그림으로 만든 무대배경 앞에서 흰 원피스를 입고 서양식 율동을 하고있는 장면과 심벌즈를 한손에 든채 가슴이 깊이 팬 상의와 짧은 스커트를 입고 독무를 추는 학생,바이올린 첼로 등 서양악기에 맞춰 독창하는 학생,남장 파트너를 껴안은채 발레를 하는 학생들은 이들이 서양문화의 첨단 수용계층이었음을 엿보게 한다.<김철훈기자>

◎당시의 평양기생들/「화초기생」으론 으뜸/용모단정하나 “쌀쌀”/만나려면 먼저 요리집 대접해야

옛 평양기생은 살결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화초기생」으로는 으뜸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가장 좋은 벼슬의 하나였던 평양감사를 지낸 사대부의 집에는 「평양집」으로 통칭되는 평양기생이 소실로 들어앉곤 했다.

평양기생은 얼굴은 예쁘지만 인정이 없다는 말도 유명했다. 애지중지하며 집을 사주고 세간살이를 장만해 주더라도 이춘풍전에서 보듯 일단 돈이 떨어지면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번 정을 나누면 운명을 함께 했던 진주 대구기생과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한량이 기생과 상대하려면 일단 요리집으로 불러 대접하고 인사를 나눈뒤 비로소 기생집에 찾아갈 수 있었다. 사정상 기생집을 먼저 방문했더라도 나중에 꼭 요리대접을 해줘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이런 절차를 빠뜨리면 화류계에 출입할 수 없는 벽창호로 낙인찍히곤 했다.

기생을 데리고 있는 권번 등에서는 가장 많이 불려나간 기생에게 은수저를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기성권번 기생들의 월수입은 3백50원∼65전으로 천차만별이었으며 화대만으로 살기가 어려워 여급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생들은 화대중 2∼3할 정도를 기생집에 바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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