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대접속 산업시찰등 9박10일 강행군/방적·봉제등 경공업분야 “활기”/노동자들 열심·품질 우리 수준우리 일행이 북경을 떠난 것은 1월15일 하오4시. 만주땅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특별열차편이었다. 사실 우리 일행중 일부는 이미 북한에 들어가 있었다. 북한 체류기간중 좀더 많은 곳을 둘러보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실질적인 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일행을 3진으로 나누어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북경역을 빠져나와 만주벌판을 달릴 때는 산이고 들이고 모두 백색의 세계였다.
전날 내린 하얀 눈은 이번 방북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몇차례 북한을 방문했지만 열차로는 처음이었다. 23시간이나 달려야 하는 열차방북이었으나 하얗게 덮인 산하를 보면서 기대와 흥분은 색달랐다.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우리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번 우리의 북한방문이 주는 의미와 앞으로의 전망 등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세계 오지를 돌며 뭔가 해내야 한다는 각오만으로 뛰어던 젊은 시절을 얘기했다. 어릴적 북한에 대한 기억도 일행들에게 얘기해줬다. 서너살때 어머니고향인 영변에 대한 기억이다.
북한당국은 우리를 위해 식당차와 널찍한 침대차를 마련해 주었으나 끝을 모르는 얘기꽃에 누구하나 침대칸으로 갈 수 없었다.
날이 훤해 오면서 북한 땅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느꼈다.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 조상들의 말발굽소리를 가슴으로 들으며 이번 북한방문에 대한 각오를 새로이 했다.
세계 구석구석을 누볐으면서도 개척하지 못한 우리의 땅. 내가 마지막으로 개척할 시장이 될지도 모르는 북한이었다.
16일 상오10시 우리 일행을 태운 열차는 압록강 못미쳐 단동에 도착했다. 거기서 간단한 입국수속을 밟았다. 과거 방북때와는 달리 대한민국 여권에 입북비자를 받게되니 날로 가까워지고 있는 남북한 관계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압록강을 건너 북한땅에 접어드니 북한의 산과 들도 모두 흰눈 일색이었다.
눈덮인 산과 들을 바라보며 열차방북을 원했던 당초 목적,좀더 가까이 북한을 보자는 내 의도는 다소 빗나갔으나 분명히 하나가 돼야 할 우리의 산,우리들의 들이라는 느낌만은 분명했다.
신의주에서 세시간 가량을 달려 평양에 도착했다. 이때가 16일 하오4시,시차를 감안하면 꼭 23시간을 달렸다. 평양역에는 나를 초청해준 북한 정무원의 김달현부총리가 마중나와 있었다. 북한 당국이 제공해 준 벤츠차에 나누어 탄 우리 일행은 경광등을 켜고 달리는 벤츠선도차의 안내를 받으며 숙소인 흥부초대소에 도착했다. 이 숙소는 국가원수급의 방문때 제공된다고 했다. 최고급 벤츠에 최고급 숙소,우리 일행이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목젖을 압박하는 각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히 여장을 풀고 나니 김달현부총리가 10여일 동안 머물렀으면 좋겠다면서 희망하는 일정을 물어왔다.
나는 이번 북한방문의 목적은 북한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남북한 합작과 상품교역 및 제3국공동진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가급적 많은 공장,각 경제부문에 대한 현황소개 및 김일성주석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마고 대답하는 김달현부총리는 기대 이상으로 세련됐으며 적극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느꼈다.
바로 다음날부터 강행군이 시작됐다.
사리원의 방적공장과 시멘트공장,평양의 선교피복공장과 애국천연색 TV공장을 둘러봤다. 선교피복공장은 생산제품을 일본과 유럽측에 수출하는 비교적 활기찬 봉제공장이었다. 이밖에 평남 덕천의 승리자동차공장,황해도 은률의 금파아연탄광,흥남의 송남청년탄광,남포의 대안중기공장을 돌았다. 6∼7일 동안에 걸쳐 계속된 산업시찰 기간내내 상오8시부터 하오11시,12시까지 둘러보고 토론했다.
나는 북한사람들이 자본가는 노동을 착취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고 나에 대해서도 그렇게 여길 것 같아 남한에서의 생활과 똑같이 강행군에 강행군을 거듭했다. 김달현부총리와 안내인들이 우리를 보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와 교역이 가능하다고 여긴 수산물현황을 보기 위해 원산에 있는 수산물가공공장에도 들렀다. 그러나 상당량 잡힐 것으로 예상했던 수산물은 기대 이하였다. 말로는 연근해의 고기들이 많이 없어졌다고 했으나 판단컨대 낙후된 설비와 어부들의 고기잡이 의욕부족 때문으로 보였다. 많이 잡아봐야 호주머니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공산체제의 맹점이었다. 우리의 원산행은 산길에 눈길로 고생만 하고 말았다.
그러나 경공업공장의 사정은 달랐다. 노동자들 모두가 열심이었고 생산되는 품질도 결코 우리것에 못지 않았다.
그들의 설명으로는 노동자 모두가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고 했다. 남한과 학제가 틀려 남한의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북한학생들은 모두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다고 했다. 인상적인 것은 남자 여자할 것 없이 모두 직장에 나간다는 점이었다. 남한의 많은 학생들이 졸업후에 뚜렷이 하는 일 없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뤘다. 높은 교육수준으로 미뤄 낙후된 설비를 고치고 기술만 제공하면 생산성은 무척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자들의 순박함도 과거 70년대초 우리 기능공들의 순박함을 연상케 했다.
시찰중에 만난 한 여성노동자는 묻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그저 웃었다. 마치 옷고름을 입에 물고 볼을 붉히는 무성영화시대의 여인 같았다.
이들 순박한 노동자들과 힘을 합해 새로운 틀을 갖춰 나가야 한다는 각오가 새로워졌으나 현지의 기간시설이 큰 장애였다. 전력사정이 결코 좋지 않았으며 도로와 항만 철도도 상당히 보완돼야 했다. 대부분 흑백인 현지 TV에서는 연일 전력배가운동,철도복구운동,채탄량배가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중공업분야도 철저한 자급자족체제 탓인지 기술개발노력의 흔적은 역력했으나 마땅히 상품화할 물건이 없었다.
마케팅노력도 없었다.
그러나 남북한 경협에 이익만을 따질수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앞으로 어떻게 접근해서 어떤 방법으로 협력,통일된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같은 생각은 김일성주석과의 면담에서 더욱 확연해졌다. 평양에서 멀지않은 별장에서 김 주석을 만난 것은 20일.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 김 주석은 나이 70정도로 보였다. 건강하고 솔직한 그의 악수에서 80의 나이같지 않았던 것이다.
노태우대통령의 안부로 시작된 김 주석과의 대화는 당초 예정시간보다 길어져 식사로 이어졌다. 극진한 환대였다.
북한체류 기간중 우리는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현지 언론은 우리 일행의 동정을 다섯차례나 보도했다. 김 주석과 대형 금강산 풍경그림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노동신문 1면에 게재된 뒤에는 우리를 알아본 북한 주민들이 인사를 하기도 했다.
만수대 예술공연에서 있었던 만찬에는 인민공훈배우들이 나와 「고향의 봄」과 「양산도」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나의 이번 방북이 애타는 민족의 바람에 얼마만한 힘이 될 수 있을까. 미래를 위해 이제는 하나가 돼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 일행은 25일 조선민항을 타고 평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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