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예부 신설로 대히트/잡화서 출발… “혼수는 반월당” 유행어도/79년 철거… 지금은 지명속에만 아스라이대구시내를 남북으로 꿰뚫는 중앙로와 동서로 뻗어나는 대동·대서로가 교차하는 넓은 4거리를 대구사람들은 「반월당 네거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반월당이 무엇이고 4거리 이름이 왜 반월당이 됐는지를 아는 연련층은 50대 이후이다.
반월당의 역사는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양말소 점원이던 대구토박이 차병곤씨(62년 작고)가 1931년 현재의 광명빌딩옆에 반월당이란 옥호로 잡화상을 차렸다.
「달이 차서 보름달(만월)이 되듯이 사업이 번청하라」는 뜻에서 반월당이라고 한 차씨는 큰돈을 벌어 1년6개월 뒤 큰길 건너 지금의 컴퓨터빌딩앞(남산동 292)에 61평 규모의 단층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이때부터 반월당은 이불 수예품 학용품 양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품목을 고루 갖춰 대구시내에서 근대적 의미의 첫 백화점이 됐다.
이보다 2년전에 무영당이란 백화점이 서문로의 한 2층 건물에 문을 열었으나 서적만을 취급해 백화점구실을 하지 못했다. 37년 룰이나 2층으로 개축하면서 반월당은 더욱 장사가 잘됐다.
반월당은 다양한 상품과 함께 다른 상점에는 없던 수예부를 신설,여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베개 이불 커튼 등 혼수품도 반월당 것을 첫째로 꼽게 됐다.
일본서 수입한 휘황찬란한 색실·털실과 갖가지 바늘·수틀 등을 갖춰 여학생 뿐만아니라 결혼을 앞둔 처녀들의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로 꼽히게 됐다. 「결혼 준비물은 반월당에서」라는 말을 상류층 처녀들 사이에 유행시키면서 차씨의 반월당은 전국에서 알아줄 정도로 만월이 되었다.
차씨는 경북여고 3회 졸업생인 부인 최소돌씨(83·대구 남구 대명동)의 수완이 큰 힘이 되어 대구·경북지역의 여고생 수예물을 독점 공급해 떼돈을 벌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오자 차씨는 또다른 사업을 하기위해 43년 수예부 「금자옥」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박모씨에게 전세내 주었다.
그러나 대히트를 또 칠것 같던 차씨의 백열등 전구공장,알루미늄공장 등의 경영이 어렵게 돼 45년 봄 반월당은 양모씨에게 넘어갔다.
차씨의 전구공장은 해방후 북한의 갑작스런 전기공급 중단으로 치명타를 입었고 자금이 돌지 않아 알루미늄공장도 문을 닫았다.
그후 차씨는 매일신문사의 광고 및 영업부장이 되어 특유의 영업수완을 발휘,신문업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다가 업무부국장이던 54세때 고혈압이 악화돼 타계했다.
반월당의 주인이 양씨에서 다시 몇단계 거쳐갔는지는 확시치 않지만 64년 오모씨(59·여)가 반월당은 인수,수예점 「금자옥」을 계속 운영했다.
그러나 이 일대가 60년대 중반 도시계획 예정지구로 지정되면서 개발이 중단,쇠락의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건물의 증·개축을 할 수 없는데다 매매마저 이루어지지 않아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수예점 「금자옥」도 손자수보다 편하고 쉬운 기계자수를 선호하는 시대조류에 밀려 역사속의 수예점으로 사라졌다. 70년대초 오씨는 수예점을 폐업하고 1,2층을 양품점 신발가게 분식점 등에 임대해 주었다.
그러나 79년 반월당은 도시계획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반월당 4거리」라는 이름만 남기고 있다. 오씨의 장남 안모시(40·회사원)는 『반월당에서 살던 중고시절에는 별다른 의미를 못느꼈으나 지금 생각하면 반월당은 우리집안 뿐아니라 대구인의 옛 숨결이 스며있는 곳이니 만큼 앞으로 정확한 사실을 챙겨보고 싶다』고 말했다.
경북여고전신인 대구공립여고보 출신의 김순이씨(75)는 『여고시절 반월당은 「행복을 만들어주는 집」으로 통했다』면서 『지금도 가끔 그거리를 지나다 반월당이 떠오르면 가슴울렁이던 여고시절이 되살아난다』고 회상했다.
향토사학자 김용진씨(73)가 아쉬워하는 것과 같이 도시개발의 불도저는 반월당에 대한 표석·표지하나 남겨놓지 않고 밀어버렸지만 대구사람들은 앞으로도 그곳을 반월당 네거리라고 부를 것이다.<대구=임재만기자>대구=임재만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