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잡은 기업기반 전란속 잿더미로/경인·삼척등 공업지대 폐허로 변모/방직·염색·화학공장등은 70% 파괴/재산 뒤로한채 기업인 대부분 부산 피란길 재촉1950년 6월25일,앞으로의 사업을 설계하며 지난 밤 늦도록 친구들과 술잔을 주고 받았던 경성방직의 김계수는 공산군이 쳐들어왔다는 부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 무렵 38선 접경에서는 공산군의 불법도발이 종종 있었고,1949년 가을 송악산전투나 옹진반도의 까치봉전투 등에서 우리 국군이 공산군을 거뜬히 물리쳤다는 보도들이 그동안 심심찮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김계수는 또 그런 종류의 침입이겠거니 생각했고 곧 국군이 이들을 격퇴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경무국에 근무하고 있던 3남 상홍으로부터 숨가쁜 전화가 걸려왔고,하오3시경에는 멀리 총소리와 포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이들은 이미 태릉앞까지 괴뢰군의 탱크부대가 밀어닥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밤이 깊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던 그는 마침내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온갖 풍상을 다 겪고 이제 순탄하게 기업을 키우겠다는 희망에 부풀어있던 그는 이렇게 6·25를 맞았고 사업은 다시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으로 빠지게 됐다.
6월25일 일요일 새벽을 뒤흔든 총성은 해방후 겨우 기지개를 켜고 활로를 찾아가던 민족의 날개를 꺾어버린 대재난이었고 기업인들에게는 애써 닦아놓은 기반을 뒤흔든 가혹한 시련이었다.
남한에 있던 근대적인 산업시설들은 대부분 파괴됐다. 방직,염색공장의 70%,화학공업의 70%,농기계공업의 40%,고무공업의 10%가 파괴됐다. 남한의 3대 공업지역이던 경인 삼척 영남공업지역중 인천과 삼척의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고 각 공장마다 뼈만 앙상한 몰골을 드러냈다. 남한의 산업활동은 완전 마비됐다.
공업시설의 피해액은 1억1천5백만달러였고,광업 발전 농업 등 모든 산업시설의 피해액은 3억5천4백만달러였다. 이밖에 공공시설 교통시설을 포함한 일반시설의 피해액을 합치면 30억3천2백만달러에 달했다. 당시 돈으로 30억달러면 엄청난 거금이다. 1945년부터 1959년까지 우리나라 경제를 지탱했던 미국 등지의 원조금 총액이 26억9천만달러였으니까 6·25가 몰고온 국내경제의 피해액이 어느정도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공산군에 밀린 정부는 남하에 남하를 거듭했고 기반을 잃은 기업인들 역시 남으로 남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밖은 열하룻달이 중천에 무심히 밝았다. 남부여대한 피란행렬이 이미 줄지어 있었다. 가족들 데리고 당주동 상홍의 처가에 들렀다. 거기에서 좀더 사태의 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날은 훤히 밝아왔으나 사태는 역시 악화일로였다. 식구들을 재촉하여 서울역에 나왔으나 아침7시에 떠난 부산행 열차를 마지막으로 이미 철도는 두절됐다. 한강 인도교를 향해 줄이은 피란행렬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무더운 뙤약볕아래 흙먼지를 마셔가며 식솔을 거느리고 하염없이 걸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거센 빗발이 퍼붓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한 김계수의 피란은 이런식으로 시작됐다.
희망에 부풀어 대그룹을 꿈꾸던 기업인들의 하나같은 피란행렬이었다. 당대의 거부 박흥식은 자신이 수입한 시멘트를 싣고 왔던 일본배를 타고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떠났고,대한산업의 설경동,삼광실업의 서선하 등 서울의 기업인들은 자신이 그동안 키운 기반들을 뒤로 한채 남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50년 1월 현대건설의 간판을 내걸고 웅지를 키우던 정주영은 26일 동생인 인영과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걸어서 서빙고 나루터까지 갔다. 작은 보트 하나로 두셋씩 강을 건네주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밀려드는 피란행렬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화가 났는지 보트를 백사장에 올려놓고 노만 들고 가버렸다. 보트주인이 눈치채지 않도록 살펴보고 있다가 냅다 달려들어 보트를 강물에 띄웠다. 노 대신 두손을 강물에 집어놓고 열심을 물을 저었다. 보트는 물살에 밀려 반포쪽 기슭에 닿았다』 정주영의 서울탈출 역시 극적이었다.
서울을 탈출한 기업인들의 사정은 그래도 나았다. 정부의 발표만 믿고 있다가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 기업인들은 허기와 불안의 다락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천하는 완전히 일변했다. 북괴가 남침한 지 나흘이 지난 29일 인민위원회에서 왔다는 자를 필두로 번갈아가며 재산과 사상에 관한 질문을 했다. 2주일쯤 지난 지난 7월10일경 혜화동 로터리를 낯익은 승용차가 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동란 이틀전에 주한 미국공사로부터 사들여 등록을 갓 마친 나의 차,미제 신형 시보레였다. 뒷자리에는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던 박헌영이 타고 있었다』 무역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던 삼성 이병철의 회고다. 그는 6·25를 적치 아래서 보내고 1·4후퇴때 자신의 기반이었던 삼성물산공사의 전재산을 처분하여 한대에 2백만원이나 하던 트럭 5대를 구해 대구로 피란했다.
동양의 이양구,금성방직의 김성곤,개풍의 이정림 등 상당수 기업인들도 적치하의 서울 생활을 겪은 뒤 뒤늦게 남으로 향했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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