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시절 국사 「요리」되던 곳/4·19땐 연일 성난 시위대 집결/71년 현도서관 신축… 권력의 무상함 증언해마다 4월이 오면 숭고한 4·19정신이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때를 증언해 주는 장소는 서울 수유동의 4·19묘지와 4·19도서관 정도뿐이다.
서울 종로구 평동 166번지. 서대문로터리에서 세종로쪽으로 가다 적십자병원을 지나치면 바로 4·19도서관이 들어있는 5층 건물을 쉽게 볼 수 있다.
1층은 「4·19의거 희생자유족회」 「4·19의거 상이자회」 「4·19회」 등 4·19 관련단체의 사무실이 있고 2∼5층은 2만1천여권의 장서와 8백여개의 열람석을 갖춘 4·19도서관이다.
하루평균 1천2백여명의 학생들이 3백원의 이용료를 내고 공부하고 있는 4·19도서관이 자유당 정권의 2인자였던 이기붕씨(1896∼1960년)의 사저 「서대문 경무대」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젊은이들도 상당수 된다.
이씨와 부인 박마리아,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양자 강석군(당시 24·육군 소위) 형제가 위세당당하게 살던 집은 4·19로 폐가가 됐으며 지난 70년 도서관건물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헐렸다.
그러나 도서관 뒤편에는 방 2개와 마루가 달린 7평 크기의 한옥별채가 남아있어 국민의 뜻을 외면한 정치인의 비참한 말로를 말해주는듯 하다.
「서대문 경무대」는 5백40여평의 대지위에 5개의 온돌방과 응접실 회의실 연회실 등을 갖춘 건평 1백20여평의 일본식 2층 집이었다.
이씨가 해방직후 일본사람으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이 집은 자유당 초기부터 주인의 지명도 만큼 유명해지면서 주요 국사가 요리되는 작은 경무대로 통해 정객과 정치지망생들로 항창 문전성시를 이뤘다.
특히 이씨의 권세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당당하던 50년대 후반에는 이씨 일가의 생일이나 연말연시,연회가 있는 날이면 대문앞에는 고급승용차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4·19가 터지자 이씨 집은 경무대와 함께 부정선거 규탄의 표적이 되어 연일 시위대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서울지역 교수들도 시위에 참여한 4월25일까지 서대문로터리에서 광화문쪽 도로는 성난 시위대로 연일 메워졌다.
이씨는 이날 하오8시께 부인과 차남 강욱군(당시 21세),경호원 2명과 함께 뒷문으로 빠져나가 경기 포천의 모군단으로 도피했다가 이 대통령이 하야한 26일 경무대로 돌아왔다.
시위대는 이씨 집의 가구와 집기를 집앞 전차길에 끌어내놓고 불을 지르며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이씨 내외와 두아들은 4월28일 새벽5시40분께 경무대 직원관사 36호에 살고 있던 프란체스카 여사의 여비서집 옆방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제3의 인물에 의한 타살설도 있었으나 당시 계엄사는 장남 강석군이 리벌버 38구경 6연발 권총으로 부모와 동생을 쏘고 자신도 자살한 것으로 발표했었다.
이 대통령이 하야한 뒤 4·19희생자 유족들은 매일 이 집에 모여 서로의 아픔을 달래면서 민주화의 과정을 지켜봤다. 이들은 「4·19의거 희생자유족회」를 이씨 집에서 발족시키고 임시 영령봉안소로 사용했다.
주인과 함께 몰락한 「서대문 경무대」는 5·16이후 수차례 공매에 부쳐졌으나 응찰자가 나오지 않아 4·19유족회가 사무실 등으로 계속 써왔다.
유족회는 64년 9월1일 집 내부를 개조,2천5백여권의 장서와 2백여석의 열람석을 갖춘 도서관을 만들었다.
현재의 연건평 6백25평에 지하 1층,지상 5층 규모의 도서관건물이 신축된 것은 지난 71년 9월.
이때부터 도서관의 운영은 4·19 유족회가,관리는 원호처(현재 보훈처)가 각각 맡아오다 82년 5월 유족회 소유로 등기이전됐다. 4·19 유족회 회장겸 도서관장인 최정숙씨(61·여)는 『4·19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과 사회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서 『4·19관련 서적 등 장서가 부족해 충분히 대여하지 못하는 것이 가슴아프다』고 말했다.<김광덕기자>김광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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