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20만… 나도 천명연행/주로 경상·전라서 「노예사냥」”/위안소 일 정부서 관리/감시심해 자살도 못해/강제징발은 한국인뿐【동경=문창재특파원】 한국인 종군위안부(여자정신대) 강제연행 책임자의 한사람이었던 요시다 세이지(길전청치·78)씨는 그것이 철저하게 일제의 국가권력에 의한 범죄행위 였음을 몇번씩 강조했다. 지바(천엽)현 아비코(아손자)시로 찾아간 기자를 반겨준 그는 자신의 고백이 역사적인 자료가 되어야 한다면서 녹음을 해두라고 청하기까지 했다.
미야자와(궁택) 총리의 종군위안부 관련 발언을 어떻게 보나.
▲분명히 해둘것은 첫째 종군위안부를 모집한 것이 아니라 노예사냥처럼 강제로 체포한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여자정신대 모집에 자발적으로 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조선총독부와 경찰 군병력의 지원을 받아 골라서 체포해간 것이니 모집이라는 말은 부당하다. 둘째는 위안소를 일본정부가 관리했다는 말이다.
위안소라면 안락한 매춘시설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마구간과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다. 사람이 살지 못할곳에 가두고 하루 몇십명씩의 병사를 상대하게 한 것이 집단강간이지 관리란 말인가. 현지부대 군의관이 위안소를 공동변소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여기있다(군의관의 전장보고 의견집이란 자료집을 제시).
강제연행 책임자였다는 고백수기를 읽었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지금의 공단·공사와 같은 성격의 노무보국회 야마구치(구산)현 본부 동원부장으로 일하던 1943년부터 44년까지 남자징용자 5천명,종군위안부 1천명 이상을 직접 연행했다.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출발에 앞서 목표인원을 현지경찰에 통보하면 어느 마을에 부녀자가 몇명이나 있는지를 조사한 자료와 지도를 제공해 준다. 20∼50명의 경찰 또는 군병력지원을 받아 트럭을 몇대씩 몰고 마을에 간다.
경비병력이 마을을 포위한 가운데 사람들을 모두 넓은 마당에 끌어모으고 젊은 여자들만 골라서 트럭에 실었다. 주로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에서 연행했다.
제주도에서도 2백여명 연행했다는데.
▲그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자원이 고갈돼 특별허가가 필요했다. 당시 제주도에는 군정이 실시되고 있었고 거기에도 군위안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인과 가족의 저항은 없었나.
▲저항이 대단했다. 몽둥이로 때리고 차고 경비병들이 총검으로 위협해 진압했다.
종군위안부들의 생활상을 아는가.
▲1938년께 중국 남경과 한구에서 장교대우로 일해서 잘안다. 그것은 매춘이 아니라 집단 강간이었다.
종군위안부중에 일본인이나 점령지 여성도 있었나.
▲강제연행한 곳은 한국뿐이었다. 일본 여성을 공급하면 병사들이 죄의식 때문에 곤혹스러워 할 것을 고려해 일본여자는 보내지 않았다.
종군위안부의 숫자는.
▲20만명이다. 당시 우리는 조선인 남자징용자 2백만명,종군위안부 20만명이라고들 떠들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강제연행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는가.
▲그때는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장에 나간 군인들을 위안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믿었고 국가가 명령한 것이니까 열심히 했다.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은 이유는.
▲1945년 동경 재판(연합군 군사재판)에서는 종군위안부 문제는 일체 거론되지 않았다. 2차대전이 끝난뒤 미국은 이미 소련과의 냉전관계에 돌입해 있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일본을 중시,종군위안부 문제는 덮어둔 것이다.
노무보국회 간부가 된 계기는.
▲옛 만주국정부의 관리로 일한 것과 중국 남경 한구에서 장교대우로 일한 경력이 있어 발탁된 것이다.
노무보국회는 어떤 단체였는가.
▲지금의 공단·공사와 같은 국가기관이었다. 각 도도현부에 본부가 있었고 도시마다 지부가 있었다. 전국회장은 귀족원 의원 요시다 시게루(길전무) 전 총리였고 내무장관 등 각료급이 고문,참여는 각부처 국장급,이사장은 내무성 경보국장이었다. 이름은 민간단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막강한 국가기관 이었다.
종군위안부 관련서류 소각지시를 받은 일이 있나.
▲종군위안부는 처음부터 극비사항 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문서는 없었다고 본다. 최근에 발견된 문서는 예외적으로 다른 문서에 부속된 것이다.
종군위안부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아있는 당사자가 극소수이므로 개인보상 보다는 선린복지기금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사죄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나이 60이 되면서부터 옛날 일을 뉘우치게 됐다. 사람이 나이 먹으면 가치관과 생각이 달라지는 것 아닌가. 84년 사비로 천안망향의 동산에 사죄비를 건립했을 때 한국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할뻔한 일도 있었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정신대출신 한국인에게 하고싶은 말은.
▲부끄러워 하지 말고 떳떳하게 증언해 달라는 것이다. 자살도 할수 없을 정도로 엄한 감시와 감금속에 당한 일이니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죄송한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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