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세대 25명 공동출자 62년 설립/통혁당연루 고초 치른뒤 공중분해서울 명동에 있던 학사주점은 정치·사회적으로 암담했던 62년 1월 판자가건물에서 4·19세대 등 학사출신 25명이 공동출자해 만든 일종의 「주식회사」였다. 4·19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 대학 학생단체대표 50여명이 61년 3월 막걸리파티를 하던중 항상 만날 수 있는 술집을 만들기로 한지 10개월만에 금싸라기땅 명동에 15평을 확보하게 된 것. 대학을 갓 졸업한 주주들이 당시 신입사원 한달봉급액 수준이던 2천원씩을 투자해 만든 술집이었으니 별다른 시설이 있을리 없었고 안주도 두부부침,빈대떡이 고작이었지만 학사주점의 소문은 장안에 퍼져 대학생 언론인 문인 등 젊은 손님들로 항상 만원이었다.
그러나 매상은 계속 늘어도 적자투성이였다.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외상도 마다않고 달라는 대로 술을 퍼주었기 때문이다.
15평 남짓한 주점은 통금 직전까지 설전이 오가는 토론장도 되고 주당들의 심포지엄장도 되면서 서슬퍼렇던 「겨울공화국」속의 「온실」이었다.
성탄절 전야나 섣달 그믐날 밤에는 통금이 없어 「막걸리대합실」에 들어가 한사발이라도 마시려는 청춘 남녀들이 줄을 이어 명동입구까지 장사진을 치기도 했다.
64년에는 신성일 엄앵란 두 청춘스타가 주연한 영화 「학사주점」이 이곳을 무대로 촬영돼 히트를 치면서 성가는 더욱 높아졌다.
명동 청동다방의 단골이었던 공초 오상순의 문하생들과 미당 서정주의 동국대 제자들도 학사주점에 거의 매일 찾아왔다. 특히 미당의 여학생제자들은 당시만해도 술집출입을 백안시하는 일반의 인식을 깨고 당당히 학사주점에서 막걸리를 들이켜며 문학을 얘기했다.
지금은 대한투자금융 건물이 된 시공관의 밴드연주자들도 가끔 학사주점에 들러 술을 마신뒤 「공연」을 했다. 이들이 연주하는 색소폰 클라리넷 음조는 찌그러진 드럼통술판과 삐걱이는 나무의자,비새는 천장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학사주점의 분위기를 가꾸었다. 이 무렵의 학사주점은 여느술집과 달랐다.
5·16으로 뒤틀려버린 역사의 물줄기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올 곧게 세워보자는 의식이 학사주점의 기저에 흐르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낭만이있되 퇴폐로 흐르지 않았고,혈기가 방종으로 빠져지 않았다.
학사주점은 건물의 임대기간 만료로 65년 봄 명동시대를 마감하고 광화문 입시학원 골목어귀로 옮겨갔다.
운영방식이 이문규씨의 1인 경영체제로 바뀌었으나 주주가 1백여명으로 늘어나고 주점공간이 30여평으로 커지면서 술집규모를 제대로 갖췄다.
대학시절 이곳에 자주 들른 회사원 송세철씨(45·서울 종로구 명륜동)는 광화문 학사주점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근로자와 민중을 상징하는 그림 몇점이 걸려있었고 벽에는 진보적인 시구와 낙서가 많았으며 아무리 떠들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대형술집 못지않게 장사가 잘되던 학사주점은 68년 7월 어느날 갑자기 문을 닫았다. 주인 이문규씨가 통혁당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주주 1백여명이 모조리 끌려가 곤욕을 치르면서 학사주점은 공중분해된 것이다.
5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이씨는 그뒤 사형이 집행됐다.
그래서인지 학사주점 멤버들은 지금도 광화문시절의 이야기를 애써 하지 않으려 한다. 아린 상처를 다시 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인듯 하다.
이들은 그러나 한결같이 『통혁당사건은 아직도 올바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는 영국풍의 화려한 대리석건물로 바뀌어 버린 명동 학사주점과 격변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광화문 학사주점은 옛 주주와 단골들의 가슴속에 추억의 자리로만 남아있다.<홍희곤기자>홍희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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