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후 꽁꽁 얼어붙은 냉전시대에서 북한을 처음 방문한 미국인은 뉴욕 타임스의 솔즈버리 부편집인 이었다. 이때가 72년 5월. 한국전이 끝난지 꼭 20년만의 일이었다. 같은해 6월 로저스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을 DPRK(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라는 정식국호로 불러주었다. 다음해인 73년 9월 북한의 유엔대표부가 뉴욕에 설치됨으로써 북한 사람들도 미국땅을 밟게된다. ◆이때부터 미국과 북한간에는 직접·간접으로 왕래의 발길이 시작된다. 77년에는 카터대통령이 북한과의 관계개선 용의를 밝힌데 이어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수교희망을 표시했으며 유엔 비동맹회의에 참석하는 북한 외상 허담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해였다. ◆그러나 카터가 물러난 뒤부터 10년간은 기자·학자의 교류가 가물에 콩나듯 하다가 87년 미국이 북한 외교관 접촉지침을 완화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어 그해만도 10여건의 각종 직·간접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88년 1월 김현희의 KAL기 폭파사건으로 한때 급냉되기도 했으나 10월에는 미 국무부가 대북한제재 완화조치를 발표하면서 왕래의 발길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89년부터는 미국과 북한의 북경주재 대사관을 창구로 하여 공식대화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양국 대사관의 참사관급 회담이라는 쥐구멍만한 채널이었다. 그렇지만 이 쥐구멍을 통해 몇구의 미군병사 유해가 북한에서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조그만 하지만 눈에 보이는 첫 성과였다. ◆그 참사관급 회담이 차관급으로 격상될 모양이다. 오는 22일 뉴욕에서 아널드 켄터 미 국무부 정무차관과 김용순 북한노동당 국제 담당서기가 수석대표로 참가하는 첫 고위회담이 열린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냉전시대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양국관계를 녹이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미국이 북한을 거부하는 한 북한의 개방은 공염불이 될 수 밖에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