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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유야무야(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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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유야무야(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15)

입력
1992.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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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기업인 단죄 시유론에 밀려/“일제의 압력에 어쩔수 없었다” 강변/교육·문화사업등 애국활동도 주장/김연수·박흥식등 무죄판결… 사회여론 외면지난 88년 5공 청문회에서 지금은 정치인으로 새출발한 정주영씨는 정치자금을 포함한 기업인과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기업인은 상황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시유론을 펼쳐 서슬퍼렇던 5공에 정치자금을 줄수밖에 없었음을 밝힌 바 있다. 즉 기업인이 온전하게 기업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거슬릴 수 없다는 논리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반민특위에 체포된 기업인들은 하나같이 일제하에서 자신들의 행동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제에 빌붙어 기업활동을 한 것만은 아니라는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각종 교육사업과 문화사업 특히 애국활동도 했음을 강변했다.

사실 김연수의 경성방직은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설립,운영한 민족기업이었다. 경성방직은 일본말 안쓰기,일본인 채용 안하기를 내부 사시로 정하고 철저하게 일본자본과 대항했다. 그는 또 1939년 6월 34만원이라는 적지않은 기금을 출자하여 양영회라는 장학기구를 설립했다. 김연수와 화신의 박흥식,경성방직의 임원이었던 최두선 김용완 등이 이사진이 되어 구성된 양영회는 일제에 억눌려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문화사업을 일으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자연과학의 연구장려,공업기술의 양성,육영사업 등을 펼쳤다.

김연수는 이처럼 철저한 민족기업가로서 활동하며 기업도 크게 번창시켜 30년대 말에는 그 위세를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만주에까지 떨쳤다. 당시 그의 재산은 1억원이었으며 그만한 돈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한반도안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을 통틀어 김연수밖에 없다는 말까지 있었다. 명실공히 국내 최대의 부호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연수의 이같은 성공은 일본인들의 끈질긴 공략대상이 됐고 마침내 그로 하여금 민족기업가로서 큰 오점을 남기게 했다. 1939년 6월 김연수는 조선총독부의 외사부장인 송택으로부터 저녁이나 함께 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요정 희락에서 술잔이 몇순배 돈 후 송택은 김연수에게 만주국 명예총영사라는 직책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만주국 명예총영사란 일제가 만주를 집어삼키고 괴뢰정부를 수립한 후 일본의 여러 도시와 서울 등에 두었던 직책이다. 김연수는 완강히 거절했으나 끈질긴 권유와 협박으로 이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연수는 결국 2대 만주국 경성주재 명예총영사로 임명됐고 나중에는 중추원­칙임참의까지 됐다. 그의 이같은 이력이 문제가 돼 반민특위에 체포됐던 것이다.

김연수는 1949년 1월8일 박흥식이 반민특위에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닥칠 어려움을 예견했다. 그는 반민특위의 검거선풍이 인지 13일만인 1월21일 반민특위 감찰부의 서상렬조사관에 의해 체포됐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기업인에 대한 공판은 그해 3월28일부터 시작됐다. 공판장인 서울지방법원의 구내는 물론 정동의 언덕까지 방청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30일에 열린 김연수에 대한 공판은 서순영 부장재판관이 주재했다. 그는 몇마디 심리를 마친 후 해방이후 개전의 정이 현저하고 도주의 우려가 없다면서 김연수를 구속 취소시킨다는 판정을 내렸다. 대신 최종언도는 추후에 내릴 것이라고 했다.

당시 국회와 행정부는 반민법을 놓고 심각한 알력을 빚고 있었다. 박흥식에 대한 병보석(보석금 1백만원)을 허가한 재판부의 결정에 국회가 이의를 걸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어수선했던 반민특위는 6월이 돼서야 속개됐고 김연수에 대한 결심공판은 6월15일에 열렸다. 서순영재판관의 주재아래 심상준검찰관이 입회하고 증인으로는 교육계의 현상윤과 최두선 김용완 등 경성방직 관계자들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심상준검찰관은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바 컸으나 그는 민족기업가였고 교육사업 등을 참작해서 공민권정지 15년에 소유재산 4분의 3을 몰수한다』고 구형했다. 이것은 당시의 분위기로 의외였으나 재판관 서순영은 한술 더 떠 김연수에게 무죄판정을 내렸다. 당시 김병로 재판부장이 사회여론으로 미루어 위험한 판정이라고 했으나 서순영재판관은 끝내 무죄를 관철시켰다.

무죄판결을 받기는 화신의 박흥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흥식의 경우는 다소 달랐다. 박흥식의 검찰관은 나중에 국회프락치 사건 때 공산당으로 판명된 노일환이었다. 반민특위 공판이 한창이던 1949년 5월 당시 국회부의장이었던 김고수와 노일환이 주동이 된 국회 프락치사건이 터졌고 박흥식의 검찰관도 바뀌었다. 바뀐 검찰부는 박흥식에게 공민권정지 2년을 구형했고 사법부는 무죄판정을 내렸다.

당시 검찰관인 정광호는 『본인으로는 피고를 구형할 만한 근거가 없다. 공소 자체를 기각하려 했으나 이미 기소된 것이니만큼 괴로운 심정을 억제할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이같이 구형하는 바이다』라고 했다. 5공청문회 당시 일부 국회의원들이 일부 증인을 『증인님,증인님』하고 부른 기억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우리 역사상 재계 최초의 시련이었던 반민특위 사태는 결국 좌·익의 싸움속에 당초 서슬퍼렇던 의지와는 달리 상당수 피고들이 이처럼 무죄 판정을 받아 일제하에서의 행위가 시유론으로 덮어졌던 것이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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