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박흥식등 잇달아 체포/“44년 군수공장 「조비」 설립 경영” 죄목/중추원 참의역임 김계수·방의석도/49년 3월부터 재판… 전국민의 관심사로 등장1949년 1월8일 하오4시30분,화신빌딩의 집무실에 있던 박흥식은 20여명의 형사대에 끌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된 것이다.
반민특위는 정식출범한 정부가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거나 고위직에서 반민족적 노선을 걸었던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약칭이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새 헌법이 공포되고 정부가 수립됐으나 사회는 여전히 불안했다. 좌우익의 대립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이 계속됐고 국회는 개원벽두부터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7월17일에 공포된 헌법에는 「…국회는 1945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제101조)」고 명문화돼 있었다. 이 조항에 의해 구성된 국회특별법 기초위원회는 반민족자의 범위와 처벌규정을 놓고 수차례의 논란을 거듭한 끝에 48년 9월22일 전문 3항32조로 된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여순 반란사건과 대구 6연대 반란사건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대외적으로는 유엔의 한국 승인문제 등이 겹치면서 반민특위의 본격적인 활동은 지연됐다.
49년에 접어들어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처벌여론이 다시 제기되자 국회는 반민특위의 예산 7천4백만원을 통과시켰고 1월5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반민특위가 정식발족됐다. 그로부터 사흘뒤인 8일 당시 재계의 거두 박흥식이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됐다.
박흥식의 죄목은 특별법 1장4조의 6호. 당시 특별법은 일제하에서 중의원 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가 되었던 자,칙임관 이상의 관리였던 자,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 등 총 11개항으로 반민족자를 정의한 뒤 이들을 10년 이하의 징역,15년 이하의 공민권 정지,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 몰수 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박흥식은 이중 제6호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의 항목으로 체포됐다.
박흥식이 이 죄목으로 체포된 사유는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패전조짐이 시작되던 44년초 일본은 조선에 현원징용령과 여자정신대 근무령 등을 공표했다. 그리고 조선인들도 이제 명실공히 천황의 적자로서 황은을 입게 됐다고 선전했다.
『조선총독부는 나에게 황은을 입게 된 조선인의 손으로 비행기공장을 세워 비행기를 생산하라고 요청했다. 장사나 하던 사람이 어떻게 비행기공장을 운영하겠느냐고 거절했으나 오늘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내일은 조선군 사령관이,다음날은 참모장이 번갈아가며 식사에 초대하고 연회장에 부르는 등의 방법으로 회유와 압력을 계속했다』고 박흥식은 회고했다.
『일제의 강요를 끝내 거절할 수 없다는 체념이 서자 이 기회에 비행기공장에 더 많은 조선 청년들을 채용하여 징용으로부터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두가지의 전제조건을 받아준다면 비행기공장을 맡겠다고 말했다』 당시 박흥식이 내건 조건은 필요로 하는 물자와 인원을 모두 확보해 줄것,일체의 간섭을 하지 말것 등이었다고 한다. 이 조건이 수락된 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약칭 조비)라는 간판을 내걸고 애국선열의 후손,독립운동자의 가족,화신의 사원들을 중심으로 2천8백명의 종업원을 모집했다는 것이 박흥식의 주장이다. 그는 또 회고록을 통해 44년 10월2일 조비를 설립하고 경기도 안양에 공장을 차려 12월7일 군수공장 지정을 받았으나 시작기만 제작했을 뿐 해방될때까지 단 1대의 비행기도 생산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조비의 임원진은 운수업을 하던 방의석과 경성방직의 김계수,영보실업의 민규식을 비롯,방규환 장직상 박춘금 이기연 김정호 등이었다. 이들 조비의 임원들중 김계수 방의석 김정호 등도 죄목은 조금씩 달랐으나 박흥식이 체포된 후 연이어 반민특위에 걸렸다. 이들 외에 태창의 백낙승과 역시 항공기제조업에 참여했던 신용석도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 등과 더불어 반민특위에 체포된 기업인들이다.
김계수는 만주국 경성주재 명예총영사,중추원 칙임참의,국민총력 조선연맹 후생부장을 역임했다는 죄목이었다. 방의석은 총독정치에 돈과 정신을 아낌없이 바쳐 중추원 참의직을 받았고 전쟁중에는 총력연맹 이사로 흥아국단이라는 친일조직을 만드는 한편 소위 애국기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육해군에 비행기 한대씩을 바쳤다는 죄목이었다. 신용욱은 조선항공기회사를 차려 박흥식의 조비와 함께 대동아전쟁때 항공기를 제조하면서 일제와 내통했고 백낙승과 김정호는 군수공업을 하며 일제를 도왔다는게 주요 죄상이었다.
49년 새해벽두부터 몰아친 재계의 체포바람은 3월에 접어들면서 재판으로 이어졌다. 일제하에서 전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가운데 큰 돈을 벌었던 기업인들에 대한 재판은 최근 5공 청문회 당시 기업인에게 쏠렸던 이상의 관심을 모았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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