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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은성」/「허무의 갈증」 채우던 문인사랑방(그때 그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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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은성」/「허무의 갈증」 채우던 문인사랑방(그때 그자리)

입력
1992.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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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잔 두고 밤새 문학토론/이봉구·김수영·전혜린·김지하등 단골/주인사후 사과궤짝 2개 분량 외상장부『서울 명동에 있던 목로주점 「은성」을 기억하십니까』

탤런트 최불암씨(52)의 모친 이명숙씨(86년 작고)가 53년 명동 유네스코회관앞 지금의 개양빌딩자리 20여평의 적산가옥 1층에서 문을 연 은성은 73년 개발붐과 땅값앙등에 밀려 폐업할때까지 이 나라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그러나 은성의 옛자리는 구청지적과에서 조차 확인이 안될 정도로 빌딩에 파묻혀 최불암씨의 기억과 당시 단골문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전쟁후 문인들을 중심으로한 명동파들은 허무와 페이소스가 끈적끈적 묻어나던 명동 골목의 음악감상실 「돌체」 「동방살롱」 「문예서점」 「갈채다방」을 전전하다 땅거미가 지면 코트깃을 올리고 약속이나 한듯 은성으로 모여들었다.

은성은 최불암씨의 어머니 이씨가 48년 영화제작자이던 남편 최철씨와 사별한 뒤 인천의 뮤직홀 「등대」를 처분하고 상경,생활고와 예술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개업했다.

통나무의자에 사기그릇 대포잔,담배연기로 꽉 찬 은성의 막걸리맛이 유별나지도 않았고 안주라야 빈대떡과 된장찌개,김치 등이 고작이었으나 당시 내로라하던 문사와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최불암씨는 『어머니는 항상 술은 마음을 열어주고 커피는 대화를 이어준다며 돈벌이보다는 문화·예술적인 분위기가 좋아 은성을 꾸려나가셨다』고 회고했다.

노란 한복저고리를 즐겨 입던 「주모」 이씨가 사기사발에 넘치도록 따라주는 막걸리로 목을 축인 단골들은 삼삼오오 문학을 얘기하고 때론 치기어린 주정도 부렸다. 술값은 주는대로 받고 외상값을 따지지 않던 이씨지만 분위기를 깨뜨리며 고성방가하는 술꾼들은 어김없이 내쫓았다. 최불암씨는 은성의 낭만을 어머니사후에 발견한 사과궤짝 2개 분량의 외상장부로 설명한다.

장부에는 외상을 한 사람의 이름대신 이씨만이 아는 별명밑에 액수가 쓰여 있었다. 「명동백작」 「명동시장」으로 불리던 83년에 작고한 소설가 이봉구씨가 그의 저서 「명동 20년」에서 『거의 매일 밤새워 술을 마셔도 술값을 주어본 일이 없고 달라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다』고 한 말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명동과 은성을 끔찍이 사랑한 이봉구씨가 카운터옆 통나무의자에 조용히 앉아 막걸리맛을 음미하며 사색에 잠기던 모습은 「은성의 풍경화」였고 그래서 은성은 「봉구주점」으로도 불렸다.

바로 이 자리에서 김수영시인은 시상을 기다듬었고 작곡가 윤용하는 「보리밭」을 구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은성은 전혜린의 고향이기도 하다.

전혜린은 어느날 은성에서 「술 몇잔에 취한 얼굴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는 유서같은 시를 끄적거렸다.

65년 1월14일 밤 노란저고리의 주모 이씨,동료문인 등 서너명과 술잔을 기울인 전혜린은 화창한 다음날 일요일 아침 수면제 과용으로 숨져갔다.

60년대 대학생이었던 김지하시인도 가끔 은성에 나타나 기성문단과 일부작가의 허무주의·허구성·소시민적 속성을 질타하면서 자기세계를 구축해나갔다.

86년 12월 은성의 여주인이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자 당시 언론은 「이 여사의 별세로 명동을 비추던 마지막 낭만의 불이 꺼졌다」고 썼다. 이제 은성을 얘기해줄 명동예술인은 대부분 타게하고 몇안되는 사람들도 명동을 찾지 않는다.

오피스텔과 은행 증권회사 빌딩이 숲을 이룬 명동에 더이상 그들이 모일 곳이 없기 때문이다.

54년 현대문학 창간 멤버였던 은성의 막내시인 박재삼씨(60)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발산하며 희미한 필라멘트 불빛아래서 막걸리잔을 부딪치던 은성시절이 그립다』며 회상에 잠겼다.<이태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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