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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정치바람/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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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정치바람/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12)

입력
1992.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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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노려 정치권과 손잡기 경쟁/김연수­한민당·백낙승­이승만 “돈줄”/적산불하·원조자금 배정 등에 특혜/「줄」 잘못잡은 금광왕 최창학은 몰락의 길로1945년 9월,고하 송진우는 경성방직 상무인 김용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성방직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이 달렸으니 있는 돈 모두를 거둬달라. 공산당에 대처하기 위한 정치자금이 필요하다』 송진우의 전화요지였다.

송진우는 당시 한민당 당수격인 수석통무였다. 그가 사장인 김연수나 전무인 최두선에게 돈 얘기를 하지않고 김용완에게 부탁한 것은 김용완이 중앙학교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송진우의 전화를 받은 김용완은 바로 김연수사장에게 올라갔다. 김용완의 말을 전해들은 김연수는 잠시 생각한 뒤 『정치자금을 내라는 얘기인데 내세. 나라가 이렇게 혼란하다가는 모든게 공산당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지』

김연수는 재고품을 몽땅 처분하여 거금 3백만원을 한민당의 정치자금으로 내놓았다. 경성방직의 김연수는 이렇게 한민당과 관계를 맺게됐다.

해방후 국내상황은 극도로 혼란했고 이 와중에서 뒤처지지 않고 뭔가를 잡으려면 힘있는 정치세력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줄을 잘 잡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적산불하,원조물자 불하,은행대출 같은 큰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핵이 분산돼 있었기 때문에 저마다 잡으려는 줄들이 달랐다. 경성방직의 김연수가 한민당과 인연을 맺고 있는 것처럼 노다지왕 최창학은 김구,태창의 백낙승은 이승만의 돈줄이 됐다. 이밖에 이종만(대동광업)은 여운형에게 줄을 댔고 박흥식(화신) 방의석(함흥택시) 등도 당대의 실력자들을 등에 업었다. 또 무명의 실업인들은 군정의 요인과 실력자를 찾아 헤매는 등 해방후의 재계는 거센 정치바람에 휘말렸다.

그도 그럴것이 해방후 6·25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자본이나 사업 경험이 보잘 것 없었던 만큼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불하나 원조자금 배정,미 군정의 힘이 필요한 마카오무역 등 경영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그 성장속도와 규모가 결정되는 기형적인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경영풍토가 기업내적인 기술개발이나 창의력,경영합리화에 의존하기보다는 권력과 밀착,특혜에 집착하는 경향을 띠게 됐다.

오늘날 정경유착의 뿌리는 이처럼 해방후 국내기업이 생성되는 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재벌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이 정경유착이라는 색안경을 쓸 수 밖에 없는 배경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정치의 전면에 직접 나서게된 것도 어찌보면 정경유착으로 오늘까지 기업을 키워오면서 정치와 돈과의 방정식을 푸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이라고 하는 것은 잘 잡을 때에만 줄로서의 효력을 갖는법이다. 오히려 줄을 잡음으로써 잡지 않으니만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해방후 재계가 잡은 줄도 마찬가지였다. 줄을 잘 잡은 사람은 본인이 미처 생각지 못한 사이에 스타덤에 올라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동안 쌓아온 재산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날리는 몰락의 길로 빠지고 말았다.

정치적인 패를 가장 잘못 쓴 기업인은 금광왕 최창학이다. 평안북도 태생인 최창학은 중학교를 졸업한 열다섯살 때부터 허리에 곡괭이를 차고 노다지를 찾아 헤맸다. 10년 젊음을 땅굴에 묻을 정도로 집념을 보인 최창학은 마침내 노다지를 찾았고 27세되던 1926년부터는 큰 돈을 쥐기 시작했다.

그는 황금왕으로 불리며 절망에 허덕이던 식민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해방이 되던 45년경에는 재산이 2천6백만원에 달해 박흥식 김연수 백낙승 등 당대의 거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이북이 본거지였던 그는 해방과 함께 자신의 재산중 대부분을 이북에 남겨놓을 수 밖에 없었으나 서울에 있는 재산만으로도 8백만원 정도는 족히 됐다고 한다. 해방이후 이만한 거금을 가진 사람은 최창학 이외에는 없었다. 그는 이 돈으로 돈놀이를 했다. 해방후 크게 휘몰아쳤던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 시절 그의 돈에 의지하지 않은 기업인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 비행기까지 헌납했던 특유의 정치적 센스를 발휘했다. 건국자금이라는 명목으로 1억8천만원의 목표를 세우고 오세창 송진우 등 1백33인의 발기로 대한독립애국협성회를 조직한 뒤 헌금을 모아 그 헌금의 처리권한을 몽땅 임시정부에 일임했다. 당시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엇갈려 이 돈이 모두 임시정부의 김구선생에게 흘러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그는 계속 김구선생과 연관을 맺었다. 지금의 고려병원 자리에 있었던 자신의 집을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 집은 반도호텔과 비교할 정도로 크고 호화로운 집으로 후에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되는 그 유명한 경교장이다.

이같은 깊숙한 정치개입은 결국 정부수립과 함께 자유당 정부로부터 미움을 사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고 하는 일마다 꼬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민당과 관계한 김연수도 정치적인 패를 잘못 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이승만에게 가까이 한 백낙승은 그 돈줄의 힘을 빌려 한국 최초의 재벌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성장가도를 질주했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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