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쳐서 기득권보호” 자구책 모색/민규식·전용순·김용완등이 주도/상의·무역협회등 설립 이익대변/권력결탁·밀수등 불법일소 경제질서 확립도해방후 대거 서울로 몰려든 기업인들은 일본이 버리고 간 적산을 둘러싸고 연일 암투를 벌였다. 경제에 관한 한 무법천지나 다름 없었다. 정치권과의 결탁과 권력을 등에 업은 행패가 횡행했다. 무역업도 특별한 원칙없이 너도 나도 뛰어들어 한밑천 잡겠다는 분위기였으며 정상적인 거래보다는 밀수가 더욱기승을 부렸다.
질서의 확립이 시급했고 기득권을 확보하려는 기업인들끼리의 자생적인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조선상공회의소와 한국무역협회 등 굵직한 경제단체를 비롯,대한방직협회,조선공업기술협회,조선연료협회 등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해방후 최초의 경제단체는 1946년 5월19일 설립된 조선상공회의소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때 설립된 상공회의소는 구 조선상공회소의 부활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조선상공회의소가 폐지되고 대신 일제의 하부기관으로 상공경제회가 있었으나 이것마저 해방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기능이 정지돼 있었다.
재경경제계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민규식(영보합자) 이동선(조선한약) 전용순(금강제약) 최순주(조선은행 이사) 이정재(풍림철강) 김용주(국산자동차)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상공회의소 설립이 추진됐다. 행정권을 쥐고 있던 미 군정 당국도 이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수많은 정당과 단체가 좌우로 갈려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어 미 군정 입장에서는 어느 단체도 상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46년 4월3일 미 군정청 상무부장(지금의 상공부장관)이었던 오정수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군정청에서 민규식 이정재 전용순 최순주 김용주 등이 모여 상공회의소 설립에 합의하고 4월5일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5월19일 정식 출범했다.
초대회장(당시는 회두)에는 민규식,부회장에 최순주 이동선 전용순 이춘옥(경남상의회장) 유일한(유한양행) 등이었다. 그리고 2대 회장에는 초대 부회장이었던 유일한,3대 회장은 전용순이 선임됐다. 민규식과 유일한은 1년을 채 넘기지 못했고 전용순 회장시대에 그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상공회의소는 해방후 혼란기에 남한의 민주진영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설립돼 미 군정청과 호흡을 맞췄다. 『당시 활동중 특기할만한 일은 메논 박사가 이끄는 유엔한국위원단이 서울에 와서 남한 단독 정부수립 여부를 놓고 의견을 모으고 있을때 상공회의소가 각계의 핵심이 되어 유엔 한국위의 각국 대표들을 개별적으로 설득한 일이었다』고 상공회의소 설립 발기인으로 당시 상임위원을 지낸 바 있는 김용주는 회고한다.
조선상공회의소 설립의 막후인물은 전용순이었고 무역협회 설립에는 정계인물이었던 김도연이 적극 활동했다. 무역협회가 설립된 것은 46년 7월. 당시의 준비위원으로는 전용순 이동선을 비롯,주요한(상호무역) 김인형(대한상사) 전항섭(전신양행) 등이었다. 7월31일에는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초대회장에 김도연,부회장에 전용순 상공회의소장과 김인형,상무이사에는 후에 무역협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이활을 선출했다. 초대 이사진에는 상공회의소 이사진 대부분과 전항섭 주요한 김용완(삼양상사) 강천석(한국물산) 김익균(건설실업) 박병교(화신무역) 등이었고 감사에는 조선은행의 구용서와 국산자동차의 김용주가 선임됐다. 당시의 회원사는 1백5개였고 그해 12월에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던 김지태(대동산업)를 지부장으로 한 부산지부도 창립됐다.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김지태의 당시 일화 한토막. 『마카오무역상들과 거래하던중 하루는 우리한테 상품을 인도하기 위한 절차를 밟으러 서울로 올라갔던 무역상들이 보증금의 두배를 내놓으며 해약하겠다고 했다. 해약금만도 적지 않은 금액이어서 이유를 물었던니 서울에서는 부산에 있는 우리보다 세배의 값을 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수 없이 해약했고 해약금으로 받은 금액을 한동안 부산상공회의소와 부산무역협회의 운영비로 썼다』
공식적인 단체가 설립돼 어느정도 질서를 찾아가던 당시에도 국내 기업인끼리의 매점매석,가로채기 등 불법이 판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이들 경제단체들의 초창기 활동은 국내 경제의 틀을 갖추는데 적지않게 기여했다.
이밖에도 대한방직협회,조선공업협회,조선잠사회,조선연료협회,조선섬유산업,건설동맹,인천공업자협회 등이 며칠 간격으로 탄생했다. 또한 건설위원회,동우회,협의회 등을 내건 각종 단체들이 하루에도 몇개씩 생겨나 기업인들의 이권다툼에서 한몫을 챙기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이중 대한방직협회는 점령지구행정구호원조(GARIOA) 자금에 의한 원면도입과 원면배정의 필요성에 따른 실수요자 단체로 삼양상사의 김용완이 1·2·3대 회장을 맡으며 초창기 섬유업계를 리드했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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