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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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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7)

입력
1991.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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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업 시발… 중국과 정크선 물물교환/제조업 기반없던 기업인들 앞다퉈 참여/백낙승·박흥식·김용주·김인형등 맹활약/미군정청선 5백28명에 면허증발급 업자난립 막아바다가 바람을 타면 격랑이 된다. 해방이 몰고 온 바람은 서해바다를 세차게 뒤흔들었다. 중국대륙과 인천항 사이를 오가는 정크선이 이 바람의 진원지였다. 서해에 이는 정크무역의 바람과 함께 초창기 재계도 덩달아 출렁였다. 해방후 이렇다할 제조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물물교환인 정크무역은 크게 활기를 띠었고 당시의 대다수 기업인들이 앞다퉈 이에 참여했다.

정크라는 말은 잡동사니 고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정크선은 이들 고물 잡동사니를 실은 소형선박이고 정크무역은 이 물건을 싣고 온 외국인들과 국내 기업인간의 거래다. 중국대륙의 천진·대련·청도 등지에서 일본 군용창고나 일본인 상사의 창고를 턴 사람들이 약탈물자를 싣고 국내에 들어왔다. 국내에서도 일본군 창고에서 터져나온 화공약품 등 각종 물자와 오징어 등을 정크선에 넘겨 줬다.

이처럼 정크무역은 처음에는 주로 약탈물자가 교환됐고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득을 노리는 물물교환의 단계로 넘어갔다. 이같은 정크무역은 해방후 약 1년반에 걸쳐 계속됐다. 당시 국내산업은 일제가 남기고간 생산시설들이 있긴 했으나 원료와 자본 기술이 없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가동되는 제조업이라고 해봐야 고무공장 성냥공장 몇개와 경성방직 동양방적 조선견직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무역업은 제조업 기반이 없는 기업인들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였고 자연히 활기를 띠었다.

우리나라의 무역업은 이같이 시작된 것이다.

정크무역 이전에도 무역업이 아주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1876년 개항이 되면서 국내에 총칼든 군대보다 먼저 일본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영국제 값싼 상품을 팔아 폭리를 취하고 한국에서는 지금과 쌀 등 식량과 해산물을 반출해 갔다. 한동안 일본인들이 독점하던 국내 상권은 뒤이어 달려온 청국과 구미상인의 쟁탈전장으로 바뀌었다. 인천항을 사이에 놓고 벌어지던 상권다툼은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 몇차례 고비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의 독무대가 돼버렸다.

열강들의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1908년 전후 우리나라의 교역국은 일본 청국 미국 스위스 헝가리 터키 등 약 20여개국에 달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도지부(오늘의 재무부)의 기록에는 1908년 우리나라의 수출은 1천4백11만3천3백원이고 수입은 4천1백2만5천5백원이라고 적혀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이미 당시에도 무역적자는 엄청났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1943년에 발간한 조선무역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개항 첫날부터 해외로 흘러나간 금 은은 틀림없이 대외구매수단인 동시에 무역차액의 결제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방대한 수입초과 금액을 갚을 수 없었고 부동산이 결제수단이었다. 합병전후 일본인 소유의 부동산이 급증한 것으로 미루어 한국인들은 결국 땅을 팔아 물건을 산 셈이다』

초창기 국내 기업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백윤수 민홍식 김윤면 박승직 등 이른바 육의전 상인,배오개 상인,남대문 상인,마포상인 등은 모두 이들 일본인의 상권아래서 나름대로 민족계 무역상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크무역시대와 함께 국내에는 일본 밀무역도 기승을 부렸다. 해방되던 해 국내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풍작이었고 한해 1천만석에 가까운 쌀을 한국에 의존해왔던 일본인들은 한국의 쌀공급 루트가 차단되자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였다. 일본인들은 따라서 당시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인들을 움직여 한국쌀을 일본에 수출토록 압력을 넣었고 이에 따라 한해동안 8만석의 한국쌀이 일본에 공식 수출됐다. 또한 서남해안의 어부들과 투기배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1백톤급 안팎의 동력선을 동원하여 쌀을 일본으로 밀수출했고 일본에서는 밀감과 시멘트 가성소다 화장품 의약품 등을 구입해와 4∼5배를 남겼다.

일본의 식량난에 비례해서 일본 밀무역은 더욱 번창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 상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정크무역이었다. 미 군정당국은 정크무역에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미 국정청 상무부에 있는 거윈 준위와 인천 항만사령부에 나와있는 길버트상사는 아편만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허가해 주었다. 이에따라 1946년 정크무역은 절정을 이루었다. 한해동안 3백여척의 정크선이 인천항을 드나들며 중국본토의 물자를 쏟아놓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군사물자와 농수산물 등 한국의 상품을 가져갔다.

미 군정청이 무역업자의 난립을 막기위해 무역업자 면허제를 실시했고 당시 무역면허증을 교부받은 업자수는 한국인 5백28명,중국인 15명으로 모두 5백43명이었다. 당시 기업인이라고 이름붙일만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정크무역에 참여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백낙승(태창),박흥식(화신),김익균(건설실업),김용주(삼일상회),설경동(대한),전택□(천우사),최태섭(삼흥실업),김인형(동아상사) 등이 당시에 활약하던 대표적인 기업이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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