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되자 「희망의 서울」로 너도나도…/박용학·서성환등 공산체제 피해 월남/전택보·이한원등은 만주지방서 귀국/이병철·조홍제등 이남기업인들도 상경 도약 꿈꿔해방이 되자 서울의 거리는 희망의 거래였다. 너도 나도 서울로 모여들어 억눌렸던 꿈들을 펼쳐보려고 술렁였다.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주와 일본등지에서 나라없는 설움속에 가난과 싸우며 기업인으로의 꿈을 키우던 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을 찾아 그 꿈을 이을 채비에 나섰고 전국 각지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던 기업인들도 서울로 몰렸다. 이때 서울로 몰려든 많은 기업인들이 혼란속에서 창업의 기틀을 닦고 훗날 한국경제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의 서울은 재벌을 낳은 산실이었다.
당시 기업인들중에는 만주와 이북에서 내려온 예비재벌들이 많았다. 38선 이북이 공산화되고 공산세력들은 모든 계층질서를 파괴하려 했기 때문에 사업은 엄두도 못낼 분위기였다. 청진에서 수산업을 하던 설경동이 8·15직후 어선단을 몰고 남하했고 이양구(동양)·최성모(신동아)·서성환(태평양화학)·전중윤(삼양식품)·박용학(대농) 등은 함흥·사리원·연백·통천 등지에서 재벌의 꿈을 품고 서울로 내려왔다.
이양구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함흥시내에 대양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식료품 도매상을 하던중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시내는 연일 크고작은 갖가지 사건들이 끊일 사이가 없었고 소련군이 진주해 오면서는 상황이 또 달라졌다. 약탈이 시작되고 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됐다. 고민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월남이었다』 그의 나이 29세되던 1947년 5월이다. 서울로 내려와 자전거 한대를 사서 과자행상에 나섰던 그는 자본금 6백만원으로 수입설탕·밀가루·과자원료를 파는 동양식품을 차려 오늘날 동양그룹의 틀을 만들었다.
『45년 10월15일. 이승만박사의 입성날이었다. 서울에 돈을 받으러 왔다가 북으로 올라가려고 동두천쯤에 이르렀는데 가까이에서 총쏘는 소리가 들려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대로 서울에 눌러 앉았다. 가족들에게는 통천의 전재산을 하루빨리 처분하고 내려오도록 기별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우편국장을 하고 있던 박용학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박용학씨는 해방 전까지 우편국일을 하면서 간장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이 가지고 내려온 20만원과 서울 우편국에서 받은 8만7천원으로 모두 광목을 샀다. 한필에 3백원씩는데 3개월이 지나자 3배 이상 올라 자본금이 1백만원으로 불었다. 이 돈중에서 25만원에 적산빌딩 하나를 사고 남대문 근처에 자전거 도매상을 차렸다. 이처럼 당시 월남한 실업인들은 무역업을 하거나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기반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해방전까지는 만주지방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사람들도 거의 다 서울로 몰려들었다. 최태섭(한국유리),이한원(동아상사),서선하(삼흥실업),전택보(천우사) 등은 만주에서 서울로와 막바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만주의 봉천에서 동화공창이라는 유지공장과 무역업을 하는 삼흥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최태섭씨는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무역업까지 대행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었다. 팔로군이 만주를 장악한 45년 종업원인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만주를 무사히 빠져 나와 우선 평안도 철산에서 모나자이트라는 광석을 생산,광업진흥공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는 자식을 키우려면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남하,서울의 중림동에 있는 고무공장을 매입,만주에서 사용한 삼흥실업 간판을 내걸었다. 그는 다시 무역업을 시작했다.
이남에서 사업을 하던 사람들도 당시로는 희망의 상징이었던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도약을 꿈꿨다. 마산 정미소와 대구 삼성상회 양조장 등을 경영하던 이병철은 한동안 대구생활을 계속한 뒤 47년 5월 서울로 올라왔고,후에 효성그룹을 일으킨 조홍제도 해방 후 고향을 떠나 이병철씨와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남의 기업인들은 이북의 기업인들보다 다소 상황이 나았던 탓인지 하나같이 서울을 찾지는 않았다. 부산 대구 등지에서 둥우리를 틀고 서울입성을 다소 미룬 채 사업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기업인들은 당시에 번창하던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등 거센 무역의 열풍속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내며 사업을 배웠고,또 번창시켰다. 해방후 혼란했던 서울은 기업들에게 꿈의 보금자리였고 희망의 일터였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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