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변화엔 관심없다 빵과 우유만 걱정될뿐”/공산주의 복귀엔 “단호한 반대” 일치【모스크바=윤석민특파원】 세계는 지금 소연방의 해체가 몰고올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소련인들은 70여년간 존속해온 자신들의 국가가 소멸하는데 대해 신기할 만큼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8·19」 불발쿠데타로부터 불과 4개월 후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옐친 러시아공 대통령이 「올해안으로」 소연방을 해체하고 새 체제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한 17일(한국시간 18일)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 역사적 사건에도 아랑곳없이 일상의 생활을 살아가기에 바쁘고 피곤한 표정이었다.
크렘린광장에서 마주친 한 중년부인은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빵과 우유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뿐이다』라며 강한 정치불신을 드러냈다.
어둡고 침울한 겨울의 모스크바거리 곳곳에는 여전히 생활필수품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줄서기가 끝간데 없이 이어져 있다. 하염없는 이 기다림은 격변하는 소련의 불안한 내일을 예고하는 우울한 상징으로 보였다.
냉전시대 세계정치지도의 반쪽을 차지했던 소련제국은 새해 1월을 기해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됐다.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이 엄청난 소식에 모스크바의 한 젊은 주부는 단지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그녀는 『내가 바라는 건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게 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약품 조차 구할수 없다』고 말했다.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세르게이 루틴이라는 한 젊은 학자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정치가 올바로 되느냐 안되느냐는 문제가 안된다. 우유가 제대로 공급되느냐 안되느냐가 보다 절박한 문제다』라고 꼬집었다.
소연방의 앞날은 캄캄하다.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운명도 불투명하다. 생활의 굴레에 짓눌린 소련인들은 그러나 이러한 정치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비탈리 레이첸코라는 한 택시기사는 『나 같은 단순근로자가 일을 마친후 집에 돌아가 먹을 거리가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했을 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3∼4년전의 고르바초프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는 모든게 새로웠고 희망에 가득차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새로움과 희망은 지금 실망과 혐오로 변했다. 어떤 면에서 고르바초프를 포함한 소련인들은 그들의 기나긴 체험을 통해 이미 오래전 소연방의 해체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막상 소연방의 소멸이 기정사실화된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식탁에 올릴 빵 걱정을 하는 생활인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모스크바에서는 아직까지 아무도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러한 사태가 곧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빵가게 앞에서 줄서기를 하고 있는 모스크바시민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15세된 딸의 어머니인 소브다가로바 부인은 『나는 춥고 배고픈 겨울을 각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나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면 우리가 결코 다시는 과거의 공산주의체제로 복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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