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서 출발 「부의 성」 구축/“도시선 안굶는다” 18세때 가출/정주영씨/15세부터 열무장사·신문배달/김우중씨/20대초 도일 막노동하며 고학/신격호씨재벌,그들은 누구인가. 선망의 대상인가,비판의 대상인가. 짧은 기간에 신화를 창조한 한국경제의 견인차로 평가받는가 하면 경제왜곡을 심화시킨 주범으로 지탄을 받기도 한다. 경제민주화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면서 재벌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창업자가 부의 성을 쌓기까지는 피와 땀과 눈물이 얼룩져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문어발식 확장·정경유착·부동산투기·탈세 등 비도덕성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고 있다. 재벌의 실체,그리고 이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재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재벌창업자의 족적과 기업부심의 뒷 얘기를 모아 재벌이력서를 엮는다.<편집자주>편집자주>
한국재벌의 대명사로 통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고향은 해당화 붉게피는 아련한 시골이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고 있는 어린시설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밭을 일구면서 뒤집어 쓴 먼지와 땀으로 입고있는 삼베옷이 죽탕이됐던 기억,콩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배고픈 기억이 더욱 생생하다. 그 지독한 가난이 싫어 그는 18세때 단돈 47전을 들도 가출,지금과 같은 부의 성을 쌓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배고픈 생활이 좌우간 진절머리나고 지겨웠다』고 회고했다.
현재 서울시내 도심 한복판에 우뚝선 빌딩들을 차지하고 있는 재벌들의 이력서를 보면 놀랍게도 가출소년들이 많다. 가난이 싫어 가출했던 청년들이 오늘날 으리으리한 회장실의 깊숙한 회전의자에 앉아 잇으며,신문팔이 소년은 현재 수천수만명을 거느리는 대 그룹의 총수가 됐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찢어지는 가난을 헤쳐나온 소년가장은 보란듯이 부의 성을 구축해 놓고 있다.
가난한 집에서 효자나듯 가난은 재벌을 낳았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한·일 양국에서 거부를 자랑하는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은 우유배달과 신문팔이로 일본생활을 시작했다. 울산 농고를 졸업한 뒤 경남도립 종축장의 기사로 일하던 신 회장은 더 큰 꿈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는 나이 21세 일본이름 시게미쓰(중광무웅). 그는 막노동판에서 무거운 철판을 져 나르면서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와세다대 이공학부에 진학했으며,마침내,세계적인 껌재벌로 부상했다. 동아제약 창업자인 강중희씨는 정주영 회장처럼 세번씩이나 가출을 시도한 끝에 동양제약이라는 회사의 외판원을 시작으로 오늘날 동아제약을 일궜고,한때 국내 재계를 리드했던 삼호그룹의 정재호씨도 16세에 가출,홀로 객지로 나와 양말과 포목을 파는 봇짐장사를 했다. 당시의 가출은 오늘날 청소년들의 가출과는 사뭇 달랐다.
대한전선그룹을 설립한 설경동씨와 지금은 해체된 국제그룹의 창업자인 양태진씨,동양그룹 창업자인 이양구씨 등은 10세를 전후해 부친을 잃고 행상과 나무를 해다 파는 등 가난속에서 남다른 노력으로 재계에 우뚝 선 인물들이 됐다.
15세의 소년 김우중은 신당동 시장에서 열무장사를 했으며 대구 피란시절에는 방천시장의 새벽을 달린 신문배달 소년이었다. 6·25때 부친이 납북당한 뒤 가세가 기울어 학비는 물론 집안살림까지 도와야 했다. 그의 부친은 대구사범학교 교사와 서울상대 교수를 지내던 중 제주도 지사로 발탁됐던 김용하씨. 김 회장의 가정은 결코 남부럽지 않았으나 6·25때 부친이 공산군에 납치당한 후 가세가 기울어 신문팔이까지 했다.
삼미그룹의 창업자인 김두식씨도 신문팔이 고학생이었고 한일합섬의 김한수씨,방림방적의 서갑호씨,종근당제약의 이종근씨,대동공업의 김삼만씨 등도 어려운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처럼 하나같이 가난속에서 기업들이 태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일제치하의 나라자체가 가난했고 해방후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난을 벗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자본 밑에서 이렇다할 자본을 축적할 수 없었고 국민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어려운 나날이었다.
오늘의 재벌을 일군 기업인들이 태어나던 1910∼1930년대 당시에 이름을 날리던 국내 자본가 기업인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미곡상과 인쇄소로 돈을 번 박흥식씨는 1931년 화신상회을 인수,백화점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고,금광에서 노다지를 잡은 최창학씨는 막강한 재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또한 오늘날까지 발전해온 삼양사의 김연수,두산그룹의 창업자 박승직씨 등이 그때부터 활약했다.
시사신보는 1911년 당시 50만원 이상의 대 자산가중 조선인은 흥선대원군의 장자인 이희,철종의 사위인 박영효,이완용 등 32인이라고 쓰고 있고 큰 회사의 사장으로 민병석 김원백 등 10여명을 들고 있다. 20년대와 30년대에는 종로통의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한 강상과,개성상인그룹인 송상 등이 활발한 상업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초기자본가들은 대부분 격동의 소용돌이를 견디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국내 정통 재계의 맥을 형성하지 못했다. 서울의 명물 화신 백화점을 운영하며 초창기 국내 재계를 주름잡았던 박흥식씨의 명성은 흔적조차 없다. 해방후까지 『사업하려는 사람치고 최창학의 돈줄에 의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현금실력을 갖고 있던 최씨는 경제혼란과 인플레 와중에서 돈놀이로 망하고 말았다.
결국 오늘날 재벌의 성을 구축하고 막강한 부를 누리고 있는 기업의 총수,창업자들은 소년시절 가난속에서 힘을 키웠던 사람들이고 가출소년이나 소년가장들이 국내 재계사의 첫장을 열었던 것이다.<이종재기자>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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