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대 국회의원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임기는 다섯달 밖에 남지 않았고 실제기능은 불과 며칠 남지않은 이번 정기국회의 회기로 끝나게 됩니다. 이미 여러분의 마음은 다음 선거로 옮겨갔고 머리도 그 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이제 한 때의 선량으로서의 대임을 마무리 짓는 시점에서 한번쯤은 남은 임기동안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여러분이 속했던 13대 국회의 헌정사적 위상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빈사직전의 의회
히틀러의 나치즘이 등장하기 직전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입지』라는 불후의 명저를 통해,의회민주주의에 대해 일종의 「사형선고」를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회주의,특히 독일의회의 경우 「당파적 지배」에 따른 여러 결함으로 인해,의회제도의 본질인 「토론에 의한 정치」(Government by Discussion)가 제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카를 슈미트의 의회주의 비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역비판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찬·반 논의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13대 국회의 온갖 변칙과 파행을 지켜본 국민들의 심경은 한국의회도 카를 슈미트가 지적한 바와 꼭 같은 이유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마땅할지도 모를 만큼 빈사상태에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가득차 있지않아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묘사하기엔 너무도 민망스럽고 비교육적인 「날치기」와 「폭력」,세법 개정없는 세입확정 등의 기형적 국회운영에 나타난 「상거래식 타협」,역대의회중 가장 많은 구속자를 배출한 의원의 「부정개입」… 이 모든 것들이 지난날의 발췌개헌,사사오입개헌 그리고 날치기 삼선개헌을 방불케하는 제13대 국회의 자화상입니다.
○속박의 사슬
이러한 여러분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원인을 축약하면,여러분이 의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체인 「공개토론의 원칙」과 헌법기관으로서의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참다운 「토론」이란 합리적 주장을 가지고 자기의견의 진리성과 정당성을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일이며,더 중요한 것은 자기도 상대방에게 설득당할 줄도 아는 자세를 전제로 합니다. 정당간이건 당내파벌간이건 이같은 「토론에 의한 정치」가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의원 개개인이 「당파적 속박」에서 독립되어 있어야하고 이기적인 이해관계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우리와 같은 정당정치풍토에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같은 회의와 자포자기가 바로 의회주의의 위기를 촉진시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국의 의회주의는 출범이래 줄곧 의회주의에 관한 일반론 곧 의회제도는 이제까지 인류가 개발해 낸 제도중에서 「가장 결함이 적은 제도」라든가 「다른 현실적 대안이 없다」는 등의 일반론만으로 옹호되고 정당화 되기에는 너무도 치명적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공개토론의 원칙」과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를 단지 여러분의 개인적 「자질부족」이나 「도덕성의 결여」 탓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한국의회정치의 현장에서 여러분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원칙아닌 구조적 철추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지난날의 투쟁의 권위는 인정되나 앞날의 비전과는 연결이 불명확한 「보스의 지배」,여러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밀실에서의 「수뇌부의 결정」과 「당의 명령」,적재적소란 낱말 조차 잊은 듯한 「파벌인사」,국민경제 감각으로는 이해도 용납도 안되지만 남이 하니까 나도 해야되는 「돈쓰는 선거」 등이 그것입니다.
의원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도 그 얼마나 이같은 당과 「보스」의 「꼭두각시」와 「돈쓰는 선거의 노예」로부터 해방되고 싶으시겠습니까. 정녕 그러하시다면 여러분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는 구조적 사슬들을 과감히 끊으십시오.
○이것 하나만은
그 구체적 작업의 하나가 바로 남은 회기동안 쟁점이 되어 있는 「정치관계법안」 하나만이라도 빈사직전에 있는 한국의회주의를 회생시킬 수 있는 획기적인 개혁법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 작업은 선거구를 몇개 더 늘린다는 따위의 부분적 수술로는 되지 않습니다. 사안이 무엇이 되었건 당리당략적 차원에서의 성급한 추진이나 반대는 금물입니다. 여러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보다 구조적인 원인인 당수뇌부에 의한 「하향식 지명 공천제」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와 TV토론을 통한 선거공영제의 확대 및 철저한 선거운동 방법의 합리적 제약 등을 통한 「돈안드는 선거」를 제도화하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이같은 작업이 없이는 멀지않아 여러분 모두가 「민주의 탈을 쓴 또 다른 권위의 노예」가 되거나,재벌의 하수인이나 땅투기 졸부들에 의해 의회에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올것이 무엇인지는 역사적 경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분발해 주십시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