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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 힐스의 누룽지/이병일 편집부국장(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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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 힐스의 누룽지/이병일 편집부국장(메아리)

입력
1991.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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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점심먹으러 가는 밥집에서 누룽지를 먹는다. 밥을 다먹은 뒤 뒷입맛으로 이를 끓여주는 것이다. 누룽지는 언제 먹어도 고소하다. 이러한 누룽지도 요즘은 밥집이라도 가지 않으면 얻어 먹기는 커녕 보기도 힘들다. 전기밥솥 덕택이다.전기밥솔 이전의 세대는 누룽지에 대해 아련한 향수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누룽지란 소리만 들어도 반갑다. 뜨끈뜨끈한 누룽지의 맛은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노릿끼리 하면서도 광택이 날 정도로 바삭바삭탄 누룽지의 풍미도 그만이거니와 누른듯만듯 밥에 가까운 보드라운 누룽지의 쫄깃쫄깃한 감칠 맛도 잊을 수 없다.

불꽃이 조금 지나쳐 검붉게 탄 누룽지가 둥그렇게 솥모양 그대로 통째로 떨어질 때가 있다. 이를 양손에 받쳐 들고 고소함과 흐뭇함에 젖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누룽지는 어려웠던 시절 중요한 간식이었다. 마당이나 밖에서 놀면서도 누룽지 긁는 소리는 어찌 그리 잘 들었는지 모른다. 검은 가마솥을 반쯤 닳아빠진 숟갈로 긁는 「빡빡」하는 소리는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조건반사적으로 부엌으로 달려가곤 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올줄 알았다는 듯이 공처럼 뭉친 따뜻하고 고소한 누룽지를 정겹게 넘겨주었다.

우리들의 어머니와 누나의 정겨운 모습엔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누룽지를 넘겨주던 모습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가장 크고 깊게 남아 있을 것이다.

고소한 누룽지,특히 광택이 날 정도로 노릿끼리하게 탄 누룽지는 불과 물의 조화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누룽지의 노란부분은 전분이 열에 변한 것이다. 이때 환원당과 덱스트린(Dexetrin·녹말을 산이나 효소로 분해할 때 생기는 물질로 끈기가 있다)이 생긴다고 한다. 누룽지의 고소한 풍미는 아미노산과 글루코스(Glucose·포도당),카보닐이 반응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생긴 휘발성 카보닐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쌀의 질과 누룽지의 풍미와의 관계에 대해선 별로 연구된 것이 없다. 그래도 누룽지하면 우리쌀 누룽지만 떠오르는 것을 봐선 상당한 관계가 있는듯 하다. 보리밥 누룽지나 옛날에 원조미로 들어왔던 안남미 누룽지가 맛있었다는 기억이 없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사실 기름기가 없어 푸실푸실한 안남미 누룽지는 별맛이 없었다.

맛이 좋다는 캘리포니아쌀의 누룽지는 맛이 어떨까. 고소하다 못해 버터냄새라도 날까. 요즘 흐름대로라면 캘리포니아 쌀밥에 누룽지를 먹어야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시아 태평양경제협력(APEC) 제3차 각료회의에 참석한 칼라 힐스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쌀 개방에 예외는 없다』고 못박고 『쌀은 몇몇 나라에만 중요할 뿐이다』라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미모에 어울리지 않게 매몰찬 것이 찬바람이 일 정도다.

미국은 현재 쌀도 수입을 금하지 않고 일반상품처럼 관세를 부과하는 쌀 관세화를 주장한다. 국제시세와 국내 쌀값과의 차이를 고려해 최고 몇백%의 초고율 관세를 붙여도 좋다는 입장이다. 다만 10년간 점차 관세를 낮춰가 10년후에는 관세없이 쌀시장을 완전히 개방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들으면 고소한 누룽지처럼 군침이 당길수도 있는 조건이다. 그렇다고 이를 선뜻 받아들이면 이 10년이 미국의 압력에 3∼5년으로 단축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때는 「칼라 힐스 아줌마」가 건네준 누룽지가 그렇게 고소하지만은 않았다는 깨달음에 입맛이 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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