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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차기총리 확정 미야자와(뉴스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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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차기총리 확정 미야자와(뉴스메이커)

입력
1991.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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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요직 두루거친 11선 “국제감각 탁월” 평/가네마루도 「총리그릇」 인정… 지도력엔 회의【동경=문창재특파원】 일본 자민당 총재후보 3명중 미야자와·기이치(궁택희일) 전 부총리는 외교통·경제통으로 알려진 원로정치인.

최근 몇번의 총재선거때마다 대권에 도전했지만 파벌의 세력이 미약해 「만년후보」라는 말을 들어온 그는 정치개혁 법안처리를 둘러싸고 자충수를 둔 가이후(해부준수) 총리의 재선도전 좌절로 어부지리를 얻었다.

최대파벌인 다케시타(죽하)파가 후보를 냈더라면 숙원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우여곡절끝에 다케시타파가 독자후보옹립을 포기하는 바람에 횡재한 셈이다.

미쓰즈카·히로시(삼총박),미야자와·기이치,와타나베·미치오(도변미지웅) 세사람 즉 「삼궁도」 싸움이라면 미야자와의 승리는 일찌감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 경륜이나 경력·두뇌·성품 등 여러면에서 그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왔다. 다케시타파의 가네마루(김환신) 회장도 개인적으로는 그를 싫어하지만 총리 「그릇」으로는 그 뿐임을 인정했다.

1919년 10월 히로시마(광도)현에서 정치인의 아들로 태어난 미야자와는 동경대 법학부를 나와 오쿠라(대장성) 관리가 되었다 정계로 나온 전형적인 「동대 법학부코스」를 밟았다. 오쿠라성 재직시 이케다(지전용인) 장관의 비서로서 미일 강화조약(샌프란스시코 조약) 체결 실무자로 일했고 53년 참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이래 참의원 2회 중의원 9회 당선기록을 세웠다.

이케다 장관이 총리가 된 62년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처음 입각한 그는 역대내각에서 노른자위 장관직을 두루 거쳤다. 통산·외무·관방·대장 장관에 당 3역인 총무회장까지 지낸 사람은 그리 흔치않다. 다케시타 내각에서는 또다시 대장장관을 지내면서 부총리를 겸했다.

스즈키(영목선행) 총리로부터 파벌회장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지난 86년이었다. 이듬해 총재선거에서는 다케시타 후보에게 패했고,부총리 재직시절인 88년 12월에는 리크루트사건과 관련된 「식언사건」에 휘말려 인책사임하는 정치적 불운을 겪었다.

화려한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경제문제와 외교분야에 탁월한 식견과 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요미우리(독매)신문의 3후보 인기조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것도 경제·외교통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이른바 「미야자와독트린」이란 아시아지역 경제권구상을 독자적으로 제창하고 있어 국제사회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다.

1m60㎝의 작은 키에 붙임성좋은 성품이 장점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결정적인 때에 책임을 지지못하며 지나치게 타산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지도력면에서는 두 후보에 다소 뒤진다는 평가이다. 그래서 정권을 잡더라도 가이후 총리처럼 「가네마루원정(섭정)」 신세를 면하기 어려우리라고 내다보는 사람들이 많다.

미야자와씨는 오자와(소택일랑) 다케시타파 회장대행이 추진하는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역할」 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정치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자위대의 다국적군·유엔군 파병도 필요하다는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가이후 총리의 재선도전 포기의 원인이었던 정치개혁 문제에 대해서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1년안에 매듭을 지을 수 있도록 여야간 협의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다케시타파의 환심사기가 지나치지 않느냐는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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