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대열낙오 아사상태 병사/정인보/반김일성 단식투쟁하다 사망/조소앙/방응모·김명준·최규동은 미 공습에 희생김규식 조소앙 정인보선생 등 6·25 당시 남북인사들의 행정과 최후가 1일 40여년만에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80년대중반 제3국을 통해 망명한 전 북한정무원부부장(차관급) 신경원씨(필명·69)의 증언을 담은 책이 국내에서 출판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에 의해 공개됐다.
신씨는 지난 51년부터 68년까지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 간부로 있으면서 납북인사 관련업무를 담당해온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가 밝히고 있는 납북인사관련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국학의 대가 정인보선생은 50년 8월 중순 평양으로 끌려간뒤 수용소에 감금당했다 아군의 북진으로 강계쪽으로 다시 끌려가던중 적유령산맥을 넘다 낙오됐다. 아사직전 구출됐으나 11월 하순 58세로 병사했다.
임정요인들로서 연로했던 김규식 조소앙 원세훈 조완구 등은 인민군의 서울점령후 2달여동안 연금돼있다 서울 수복직전인 50년 9월26일 밤 연금처였던 성북동 안가에서 함께 북으로 끌려갔다.
이중 김규식은 평양을 거쳐 계속 북쪽을 향해 가던중 그해 12월10일 만포부근 군병원에서 지병인 천식이 악화돼 69세로 숨졌다.
조소앙은 전쟁이 끝난뒤 김일성체제 강화에 저항,「재북평화통일 촉진협의회」를 결성(56년 7월),단식투쟁 등으로 민족주의적 독자노선을 고수하다 58년 9월10일 평양 남산의 한 정부병원서 71세로 병사했다.
원세훈(당시 국회의원)은 59년 12월25일 72세를 일기로 평양에서 병사. 조완구는 54년 10월27일,독립운동가로서 국학대학장을 지냈던 윤기섭도 59년 2월말 78세로 각각 평양에서 병사했다.
북으로 끌려가는 도중 고생을 못이겨 숨지거나 미군의 폭격에 숨진 인사들도 많았다.
독립운동가이며 미군정청 초대 통위부장이었던 유동열은 50년 10월18일 수용소였던 평양에서 북쪽 지역으로 옮겨지던중 자강도 희천에서 73세를 일기로 고생을 못이기고 숨졌다.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는 50년 9월28일 개성북쪽 서흥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 김붕준도 방 사장과 같이 숨졌다.
중동학교 설립자로서 서울대총장이었던 최규동은 50년 10월18일 평양부근 용성마림 마을에서 미군의 공습에 폭사했다. 당시 69세.
최와 함께 평양수용소에 있다 이동중 공습을 겪은 이광수는 다행히 포화는 피했으나 지병인 폐결핵으로 50년 10월25일 만포면 고개동 마루턱에서 운명했다.
이밖에 김구선생을 모셨던 독립운동가 엄항섭은 조소앙 등과 재북평화통일촉진 협의회에서 반김일성 운동을 벌이다 화병을 얻어 62년 7월30일 평양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백관수(전 동아일보 사장·재헌의원)는 지병인 폐결핵으로 고생하다 61년 3월초 선천의 한 요양소에서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최린은 50년 8월중순 정인보 등과 함께 납북되어 58년 12월말 선천에서 노환으로 80세로 숨졌다.
신씨에 의하면 이러한 요인납치는 50년 6월28일 노동당 조사위원회에서 처음 계획이 수립됐다.
이어 7월3일 김일성(최고사령관)과 김두봉 허가이 김책 홍명희 박헌영 등이 참석한 중앙위 정치국과 군사위 합동연석회의에서 「모시기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구체적인 작전내용을 확정했다.
또 실무집행은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이 맡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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