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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앞두고 북가족 그리는「부산의 40년 인술」장기려박사(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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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앞두고 북가족 그리는「부산의 40년 인술」장기려박사(초대석)

입력
1991.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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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이 곧 고향 가족사랑”/서민위해 「의보효시」 창설 큰 보람/유엔가입 계기 이산아픔 풀리길/결혼은 한번 하는것… 참사랑 믿어 북아내 편지받고도 “담담”1950년 12월 평양에서 남하,북에 있는 아내와 다섯남매를 그리며 살아온 장기려박사(부산 청십자병원 명예원장)의 올해 추석은 설렘이 가득한 기쁜 명절이다. 생사를 몰라 명절이면 더욱 애타게 그리웠던 가족들의 건강한 모습이 담긴 사진과 아내의 편지를 얼마전에 전해받은 그는 이제 남북한 유엔가입도 이루어 졌으나 멀지 않아 가족을 만날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남하한후 41년동안 독신으로 지내며 가족 대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헌신해온 그는 8순을 넘긴 요즘에도 매일 청십자 병원에 나가 무료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그를 만나 「가족사랑·이웃사랑」 얘기를 들어본다.

▼가족들의 사진과 편지를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미국에 살고있는 조카가 3년전 수소문하여 아내와 5남매가 모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소식만으로도 감사했는데,지난 여름 조카가 직접 북한에 가서 그들을 만났고,사진과 편지를 받아다가 나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딸 하나는 평양에,나머지 가족은 강계에 살고 있다는데,5남매가 모두 잘 성장한 모습을 보니 꿈만 같습니다.

아내는 몰라볼만큼 늙었고 피골이 상접하게 말라 사진을 볼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가 헤어질때 아내는 38살이었는데,여자 혼자 다섯아이를 키웠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습니까. 아내의 편지는 그저 담담했는데,그 편지를 읽는 내마음도 스스로 놀랄만큼 담담했습니다. 서로가 살아있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었고 서로의 사랑이 변치않으리라는 것 역시 굳게 믿었기에 우리는 크게 놀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남·북한의 유엔가입이 통일을 앞당기고,이산가족의 상봉을 앞당기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통일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만은 앞당길수 있어야만 남·북이 유엔에 가입하는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유엔 동시가입은 이제 남·북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것을 온세계에 공식선언한 것이니 이산가족 교류부터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1950년 남하하신후 사랑의 인술을 실천하며 한 평생을 보내셨는데,그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어렸을때부터 하나님을 믿었는데,경성 의전 시험을 치면서 「하나님,제가 의사가 되게 해주신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했었습니다. 소년시절의 그 약속이 나의 한평생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당대의 명의였던 스승 백인제교수의 조수로 일하다가 스승의 만류를 뿌리치고 평양의 기독병원으로 갔었는데 거기서 해방과 6·25를 맞았고,1·4후퇴때 두세달이면 돌아올수 있겠지하는 생각으로 차남 가용(현재 서울대 의대교수)만 데리고 남하하게 됐습니다. 피란지 부산에서 나는 유엔 민사원 조처의 원조로 경도에 차린 천막병원에서 오갈데 없는 행려병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여러 사람들과 뜻을 모아 복음병원,청십자 의료보험,청십자병원 등을 창설할 수 있었던 힘은 물론 신앙의 힘이었으나 마음속 깊이 가족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불쌍한 이웃을 위해 일하는 만큼 북에 남겨두고온 아내와 아이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되리라고 나는 믿었습니다.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됐을때 나는 나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도 잘자랐고 아내도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그들도 누군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장남은 약학박사,3남은 물리학 박사가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선생님이 부산에서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을 만든것은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 10년전의 일인데,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그때 성경공부를 함께하는 「부산모임」이란 모임이 있었는데 사회운동가 채규철씨가 서민들에게 의료혜택이 돌아갈수 있도록 의료보험 조합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모두 힘을 합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23개 교회에서 7백명의 회원을 겨우 모아 담배한갑에 1백원이던 그 당시 월 60원의 회비를 받았는데,두사람 치료를 해주고나니 회비가 바닥나 버리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복음병원이 지정병원으로 크게 지원해 주었으나 적자와 주변의 몰이해로 오랫동안 어려움이 많았고,74년부터는 흑자살림을 꾸릴수 있었습니다.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은 지난 89년 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청십자 의료공제회로 개편됐는데,우리나라 의보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어려서는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제 별명을 「금강석」이라 붙여주시고 늘 「이 애를 하나님의 큰 그릇으로 귀하게 써달라」고 기도하셨는데,제 신앙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사회선배로는 10년쯤 위인 함석헌·김교신선생과 가까이 지내며 늘 배웠고 「사회를 구원함으로써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함선생의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인술의 큰 스승이셨던 백인제 선생으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는데,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내가 남하해보니 선생님은 납북되고 안계셨습니다. 전종휘 박사는 경성의전 후배인데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의 자세를 늘 존경하고 있으며,나의 온갖 대소사를 상담해주는 내인생의 주치의입니다』

▼부부가 서로 떨어져 40여년을 독신으로 살면서 변하지 않았던 사랑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결혼한지 15년쯤 되었던 어느날 나는 우리 부부가 정말로 참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낀적이 있습니다. 나는 책을 읽고 아내는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그순간 나는 우리의 사랑이 육의 한계를 넘어 죽거나 헤어지더라도 영원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나는 참사랑을 아내에게 고백했고,아내도 오늘까지 참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40년 동안 나에게 재혼을 권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결혼이란 한번만 하는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저 세상에서 까지 영원할 겁니다.

▼통일이 되면 어디서 살고 싶습니까.

『부산에서 40여년을 살았고 많은 일을 이곳에서 했으나 가능하면 부산에 살고 싶기도 합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 용인에서 12년,서울에서 18년,평양에서 10년,부산에서 40년을 살았으니 부산은 나의 고향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내소유의 집한칸이 없으면서도 지금까지 여러분의 보살핌으로 잘 살아 왔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나야말로 고등거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대담:부산에서 장명수 편집국차장>

◆약력

▲1911년 평북 용천군 양하면에서 출생

▲경성의전 졸업·의학박사

▲서울대·부산대·카톨릭대교수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복음병원의 전신인 천막병원 개설

▲1959년 국내 최초로 간 대량 절제수술 성공

▲1968년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 창설

▲1975년 청십자병원 설립

▲부산시민상·대한의학회학술상·국민훈장·막사이사이상(79년)·호암상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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