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집권자마다 「경제실험」 실패(소련공산당 74년:하)

알림

집권자마다 「경제실험」 실패(소련공산당 74년:하)

입력
1991.09.01 00:00
0 0

◎스탈린,피의 숙청·농업 집단화/흐루시초프 「평화공존」 브레즈네프 등장후 제동/고르비 「사회주의원칙 복귀」시도 쿠데타로 종말볼셰비키 세력들이 그들마저 경악을 느낄 정도로 손쉽게 권력을 장악했을때 그들의 당원 수는 불과 2만3천명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볼세비키들은 제정붕괴 이후 모든 정치세력들의 대국민 최대 공약사항이었던 제헌의회 선거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10월혁명 한달만에 있은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제1당이된 것은 사회혁명당으로 3백80석을 차지했고 볼셰비키는 그 절반도 안되는 1백68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다.

개원 첫날 제헌의회가 반볼셰비키적인 결의안을 속속 통과시키자 볼셰비키는 당일로 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비볼셰비키 정당들의 활동을 규제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74년뒤 대의기관인 최고회의가 「변명」할 기회도 주지않은 채 공산당의 활동을 정지시킨 것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부각되는 「역사의 보복」이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의 기간은 반볼셰비즘의 내란을 극복하는 기간이었다. 18년에는 트로츠키에 의해 적군이 창설됐으며 또한 당의 명칭도 「볼셰비키의 전 러시아공산당」으로 바뀌었다.

19년 제8차 당대회를 열어 레닌의 주도아래 제2차 공식강령을 채택,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실제로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관한 계획들을 발표했다. 내란기간중에 실시된 ▲전산업에 대한 국유화와 자원의 중앙분배 ▲상업의 국가독점 등 이른바 전시 공산주의 경제정책은 소련경제를 극도의 파탄상태로 몰고갔다.

레닌은 결국 내란과 외세의 간섭을 극복하고 어느정도 정권이 안정된 21년 신경제정책(NEP)을 발표한다. NEP의 처음 목표는 혁명의 동맹군이었던 농민들을 위한 것으로 강제징발제도를 철폐햇으며 소규모 지주들을 옹호했다.

경제구조의 부분적 자유시장화와 농민보호는 결국 자본주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당내 반발이 있었으나 레닌은 이를 「좌익 소아병주의자」라고 일축했다. NEP정책은 공업부문까지 확대됐고 이에 힘입어 23년께 소련경제는 1차대전 이전의 수준을 회복한다.

24년 레닌이 죽자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됐다. 레닌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삼았으나 결국 승리를 거둔것은 당을 장악한 스탈린이었다. 적군의 창설자이며 정부조직내에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었던 트로츠키에 대한 스탈린의 승리는 소련공산당이 종말을 거두기 바로 한해전인 지난해까지 견지했던 정부에 대한 당우위의 원칙을 결정지었다.

또한 스탈린의 승리는 「동시 혁명론」에 대한 「1국 사회주의」 노선의 승리이기도 하다. 트로츠키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당기구를 장악한 지노비예프와 카몌네프의 협력을 얻은 스탈린에 의해 정치권으로부터 축출됐고 29년에는 드디어 국외로 추방됐다.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28년 NEP정책을 폐기하고 농업집단화와 공업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스탈린의 농업집단화정책은 농민들의 극심한 반발과 함께 당내로부터도 비판이 제기됐다. 이같은 사정을 배경으로 30년대 스탈린의 무자비한 피의 숙청이 등장하게 된다.

피의 숙청의 무자비성은 통계수치를 통해 엿볼수 있다. 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키로프의 암살을 계기로 시작된 피의 대숙청은 38년 대충 마무리되는데 이 기간동안 2백20만명의 당원이 1백40만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스탈린과 같은 구세대의 볼셰비키전원,그리고 34년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및 총회 대의원 60%가 테러에 희생됐다.

대숙청의 와중에서 「혁명이전세대」가 몰락하고 「혁명이후 세대」가 등장하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가 강요됐다. 제정러시아의 황제숭배를 연상시키는 이같은 개인숭배는 볼셰비즘의 러시아적 전통의 극단적 발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농업의 집단화는 피의 숙청의 와중에서 거의 완결돼 지난한 것으로 여겨졌던 농업에서의 사회주의화를 이룩했다.

53년 스탈린의 사망은 소련공산당 역사에 또다른 전기를 마련한다.

56년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개인 숭배를 단죄하고 당 지도의 집단지도체제 환원 ▲레닌이 제시했던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사이의 전쟁 불가피론을 수정,양대진영의 평화공존을 제시하고 ▲볼셰비키방식의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서도 사회주의로 이행할수 있다는 「사회주의의 평화로운 길」을 인정했다.

흐루시초프의 개혁시도는 국제적으로는 해빙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했으나 국내적으로는 64년 그의 실각으로 실패했다. 흐루시초프 실각이후 소련의 지도층은 여러차례 바뀌었으나 이데올로기적 변화의 시도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

계획경제체제의 비능률성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던 공산당 지도부는 극히 제한된 범위내에서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하는 시도를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소련이 정치와 경제는 브레즈네프의 장기집권체제하에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됐다.

83년 브레즈네프의 사망이후 안드로포프,체르넨코의 노약한 서기장을 거쳐 5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의 당개혁 노력은 요약해서 말하자면 사회주의의 원칙으로의 복귀였다.

고르바초프는 당의 행정부에 대한 지배가 경제의 비효율성을 가져온다는 시각에서 당정분리를 추구했으나 공산당을 개혁,정치세력으로 남겨놓자는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의 당초 목표는 레닌주의로의 회귀였으나 결국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폐기 ▲의회주의 원칙의 채택 ▲다원주의의 인정으로까지 발전한다. 지난 7월 당중앙위 총회에서 있었던 마르크스 레닌주의 폐기는 소련공산당이 볼셰비즘 전통과 단절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공산당을 헌법적 질서안으로 끌어들이려던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8월19일의 쿠데타로 배반당했고 그것은 결국 그들의 수명을 단축하는 것이었다.<유동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