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마저 비전없이 사리만/“일하면 뭣하나” 허무주의 심각경제기획원은 31일 올들어 8월말까지 소비자물가가 8.3%나 올라 10년만에 최고 기록을 냈다고 발표했다. 올해 목표로 정부가 내세웠던 8∼9% 억제선은 사실상 무너졌고 연내 한자리수물가 유지도 어렵게 됐다. 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물가는 통계보다 훨씬 심각하다. 31일 상오 서울 수유시장에서 이루어진 거래는 달랑무 2단에 5천6백원,무 큰것 하나에 2천5백원,파 1단에 1천7백원. 그래서 간단한 찬거리 3가지를 사는데 1만원 돈이 들었다.
2만∼3만원 들고는 장보러 가기가 어렵게 된것이 요즘 물가상황이다. 한달에 1백만원 가까운 생활비를 쓰고도 먹을게 없고 쓴게없는것 같아 몇번씩 가계부를 정리해본다는 주부들이 많다. 월급을 도둑맞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는 말들을 한다. 얼마전만해도 장관급 월급이던 1백만원이 우스운 돈이 됐다.
1백만원을 한푼 안쓰고 몽땅 저축을 해서 1년을 모아야 강남에 있는 아파트 한평이다. 20∼30년을 그렇게 모아야 집 한채가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내 평생에는 안된다』며 집마련을 포기해버린 무주택자들이 많다.
통계물가는 8% 남짓이지만 생활물가는 폭등이다. 6공들어 3∼4년새 주거비 생활비가 2∼3배로 폭등하는 바람에 민생불안이 경계수위에 달해있다. 무엇보다 위험스러운 것은 경제적 허무주의가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가가 2배 3배로 뛰는데 월급 몇십% 오르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한푼두푼 모아봐야 뭐에다 쓰겠느냐는 파괴적인 허무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것이다.
벌어도 소용 없고 모아도 소용 없다는 경제적 허무주의와 좌절감이 팽배한 곳에서 근로의욕이 나올수는 없는 일이다. 한탕 투기로 눈깜짝할 새에 1억 2억을 손쉽게 버는 이웃이 있는 곳에서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없다.
지금 우리 경제를 멍들게 하고 있는 핵심적인 독소는 인플레와 투기라는 것이 대다수 경제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총선과 시·도지사선거,대통령선거 등 미구에 줄을 이어 치러야할 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재정을 방만하게 벌이면서 통화수속도 하지 않고 흐트러진 자세로 인플레를 방치하는 것은 6공이후 수삼년 누적시켜온 인플레요인과 인플레심리를 다시한번 폭발적으로 확산시켜 우리 경제의 구조와 틀을 단번에 망가뜨려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인플레와 정치불안이 겹치면 무쇠도 녹여버릴만큼 무서운 파괴력을 갖게된다는 것이 남미의 교훈이다. 우리 경제가 흘러가고 있는 방향이 바로 그런 곳이다.
정치인들은 대권을 쫓아 어지러운 당파싸움에만 골몰하고 있고 관료집단은 정열이 식어 더이상 헌신적이지 않고 기업인들은 의욕을 잃었고 근로자들은 근면성을 잃어 우리가 경제개발의 무기로 삼아왔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다. 국가적 비전을 갖고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는 정치인도 없고 밤새워 일하는 헌신적인 관료도 없고 왕성한 투자의욕과 개척정신을 가진 기업인이나 부지런한 근로자도 없어져 가는 상황이다. 경제가 주인을 잃고 방향도 목표도 없이 되는대로 표류하고 있는 모습이다.
3공때는 성장·개발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있었고 5공때는 안정이라는 국가적 목표가 있었지만 6공은 성장도 잃고 안정도 잃고 이렇다하게 내세울것이 없다. 나라전체에 경제적 허무주의만 팽배하고 있다.<박무 경제부장>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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