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거리엔 삼색기 물결·“러시아 만세” 연호/공산 이념약화 따라 민족감정 대분출/소수민족들 “패권주의 우려” 부활 경계보수파의 쿠데타 기도를 분쇄한 모스크바 시민들의 반쿠데타 저항운동의 열기가 수십년간 잠재돼온 러시아 민족주의의 분출로 이어지고 있다.
민중항쟁의 승리가 확인된 지난 21일 투쟁의 거점이었던 러시아공 의사당앞에는 러시아공의 적백청 삼색기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 운집한 시민들은 『러시아공화국 만세』 삼창으로 러시아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면서 「러시아의 재탄생」을 경축했다.
망치와 낫이 그려진 소연방의 적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군중앞에 등단한 보리스·옐친 러시아공 대통령은 연방의 적기를 폐기하고 볼셰비키혁명 이전의 러시아국기였던 삼색기를 새로운 러시아의 국가상징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반·실라예프 러시아공 총리는 『오직 러시아인만이 쿠데타기도에 분연히 맞서 싸웠다』고 러시아인의 민족적 긍지를 부추겼다. 그는 이어 『우리는 오늘 그 옛날 위대했던 러시아인의 전통을 되살렸다. 러시아인은 언제나 위기에 용감히 대처했고 끝내는 승리했다. 러시아는 세계를 구했다』고 열변을 토했다.
알렉산데르·루츠코이 러시아공 부통령도 나섰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위대한 러시아」의 시대가 개막됐다』고 외쳤다.
이들 러시아공 지도자들은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의 건의를 받고 즉석에서 성조지 십자가와 같은 차르시대의 훈장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날 행사가 치러진 광장을 「자유 러시아 광장」이라고 명명했다.
이날 발산된 러시아 민족주의의 열기는 다른 어떤 이념과 정서를 압도할 만큼 강렬했다고 외부의 목격자들은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날 행사를 「소비예트 연방주의에 대한 러시아 민족주의의 승리」를 경축하는 자리였다고 표현했다.
당연히 소련내 여타 소수민족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러시아 패권주의」의 도래를 우려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차르시대에 강경 러시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탄압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강경 공산통치기간중 러시아공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식 통제에 위축됐던 다른 소수민족들도 러시아 민족주의의 부활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이들은 최근 호전적인 러시아 민족주의 단체인 「파미야트」그룹이 부각되고 있는 현상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러시아 패권주의」의 도래에 대한 소수민족 공화국들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이들은 옐친 대통령이 각 공화국에 자율권을 대폭 부여한 신연방조약안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번 보수파의 쿠데타기도 저지로 영향력이 확대된 옐친 대통령의 주도로 신연방조약이 체결돼 와해위기에 처한 소연방의 재결속을 이루게 될 것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문제는 유고 세르비아공화국의 민족주의자들이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공화국 등의 연방탈퇴 노선을 극력 반대하고 있는데서 엿볼 수 있듯 다민족연방국가의 강경 민족주의는 특정 민족의 패권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보수파의 쿠데타기도 실패이후 급격히 고조되고 있는 러시아 민족주의의 열기를 러시아 패권주의의 조짐으로 보는 것은 아직은 분명 근거가 약한 위험한 발상이다. 오히려 공산주의 이념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면서 70여년간 억눌려온 민족감정과 정서가 자연스럽게 되살아나는 현상으로 풀이하는게 보다 타당한 분석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분열과 혼란의 늪으로 몰아넣은 요인의 하나가 극심한 민족분규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김현수기자>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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