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각국 대일청구 거센물결/중국인들 1천8백억불 요구… 남태평양 소도도/홍콩인 “뺏긴돈 반환투쟁 자자손손 포기 안할것”아시아 여러나라들이 일본에 전쟁피해보상을 요구하고 나선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전후 46년의 세월이 흐르는동안 피해당사자들은 인생의 황혼기를 맞았고 더많은 사람들은 원한을 품은채 죽어갔다. 살아있는 피해자들이 이제야 보상요구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형식적이나마 보상을 받지않고는 일본의 과오를 잊을수도 용서할수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집단행동을 시작했다고도 할수 있다.
중일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넘도록 입을 다물고 있던 중국인도 최근 민간피해 보상금조로 1천8백억달러를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1952년 화일 평화조약과 72년 중일 공동성명을 통해 중국정부가 대일전쟁 배상을 포기한이후 일절 보상요구를 하지않던 중국이 민간피해 보상을 거론한것은 이것이 두번째 케이스.
태평양전쟁기간중 하나오카(화강) 탄광에 강제연행당해 숨진 4백18명의 유가족들이 89년말 회사측에 1인당 5백만엔씩의 보상을 요구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것이 특정피해자 군의 대기업요구인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2천만명이라고 운위되는 중일전쟁기간중 희생자의 피해를 총괄,국가에 대해 보상을 요구할 움직임이다.
말레이시아의 징용자들도 지난 3일 일본에와 태면(태국미얀마) 철도공사에 동원돼 많은 인명이 희생당한데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중국계인 송일개씨(75)는 중노동·식량부족·전염병 등으로 함께 징용당했던 중국계주민 7백80명중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49명 뿐이었다면서 『그들이 중심이 돼 3년전 대일보상 요구운동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병보출신자들은 미불임금 6백50억엔의 지급을 요구하고 나섰다. 최근 일본에 왔던 병보출신자 연락중앙협의회 사무국장 타르십·라할조씨(66)에 의하면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점령중 2만5천여명이 병보신분으로 징집당했는데 근무기간중 월급을 강제 저금당하고도 아직껏 반환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홍콩 사람들도 일본군이 홍콩달러를 빼앗아가고 나누어준 군표(군용수표)의 결제를 요구하고 있다.
최근 동경에서 열린 일본의 전후보상 촉구행사에 참석했던 홍콩 삭상협회 주석 오일흥씨(55)는 『41년 12월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이 강제로 홍콩달러를 군표로 바꾸게 한뒤 지금까지 결제받지못한 것이 5억원이나 된다』면서 『자자손손 군표 테환투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베라우(팔라우)는 의회에 「구식민지 지배보상특별위원회」를 두어 전사자유족의 연금지급과 유골회수운동을 전개중이며,필리핀도 패전직전 일본군이 「미군에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많은 양민을 학살한데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으로부터 유일하게 「보상」을 받은 대만의 피해자들도 만족할수 없다고 한다. 77년 8월 일본군으로 징병당했다가 전사한 대만인 유가족들이 보상청구소송을 제기,87년 1인당 2백만엔씩의 「조위금」을 받았다.
그러나 현역병들이 강제저금으로 떼인 급료와 징용자들의 미불임금도 받아야겠다면서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 아시아의 피해자 단체들이 약속이나 한듯 대일 보상요구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일본정부나 관련기업은 녹음기를 틀어놓은듯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할 뿐이다.
한국의 각 단체들에게 『65년 한·일협정으로 배상의무는 모두 끝났다』고 대답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물론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정부가 대일배상을 포기했기 때문에 민간피해도 보상할수 없다고 말한다.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1958년 양국사이에 평화조약과 배상협정이 맺어졌으므로 보상의무는 소멸됐다』고 말하고 있다. 팔라우에 대해서도 「미크로네시아 협정」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이 유일하게 「보상」 형식으로 대만의 전사자 유족들에게 2백만엔씩을 지급한것도 보상의무를 인정한것이 아니라 「인도상」의 책임이 있다는 최고재판소 판결에 따른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보상책임을 인정할 수 없으나 인도적으로는 조위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내려지자 일본정부는 87년 특별법을 만들어 글자 그대로 조위금에 지나지않는 액수를 지급한 것이다.
일본의 전쟁피해자들도 정부에 대해 민간부문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있는데,일본정부는 국가와 개인의 청구권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정반대의 논리로 이를 지지하고 있다.
2차대전이 끝날무렵 시베리아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극지의 수용소에서 오래도록 억류생활을 했다. 이때 많은 사람이 기아와 혹한속에,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죽거나 병들었다. 생환한 사람들은 81년 일본정부를 상대로 시베리아억류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56년 소련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채택한 공동서명에 서로 청구권을 포기키로 했으므로 일본정부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이에대해 외무성의 다카시마(고도) 심의관은 지난 3월 국회답변에서 『소련에 대해 포기한것은 국가자체의 청구권이지 국민개인이 소련 또는 그 국민에게 청구권을 포기한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자국의 피해에 대해서는 철저히 따져서 보상을 받아내려는 일본이 언제까지 어거지논리로 외국피해자들의 보상요구를 「다 끝난일」이라고 외면할 것인지,온 세계가 일본의 태도를 주시하는 이유의 하나가 이 말속에 숨어있다.<동경=문창재특파원>동경=문창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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