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죄 용서될지 지금도 두려워”/사면보답 위한 책이 호응커 뜻밖/사회봉사로 속죄인생 살았으면/갈등과 번민 신앙생활로 위안… 남한사회의 이기주의등엔 거부감도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고백록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가 폭발적인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그가 다시 화제에 오르고 있다. 6월20일 고려원에서 초판이 나온 이 책은 50여일만에 1,2부 합쳐 45만부가 팔렸고,일본 문예춘추가 번역에 착수,일본에서도 1백만부 이상 팔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출판에서 10%,일본어판에서 8% 인세를 받아 「부자」가 될 날을 눈앞에 두고있는 김현희를 만나 본다.
▶고백록은 언제부터,어떤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습니까.
『작년 4월 사면을 받은후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죄인으로서 사면을 받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일 중의 하나가 진실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9·10월부터 지난 5월까지 거의 매일 저녁 글을 썼는데,글을 쓰면서 많이 울었고 도저히 쓸수없어 중단한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KAL기를 폭파하러 떠날때부터의 얘기를 쓰기가 힘들었습니다. 의무감에서 글을 썼을뿐 책이 팔릴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책이 잘 팔린다니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는 책 제목은 누가 정했습니까.
『책 제목으로 「가슴속에 묻어두고 싶은 이야기」 「영원한 눈물 영원한 고백」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등 몇가지를 놓고 여러분과 함께 의논을 했는데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가 가장 제마음에 들었습니다. 북한에 있을때는 공작원이 된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었지만,남쪽에 와서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면서 나는 한번도 사람답게 여자답게 살지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특히 한창나이에 공작원 훈련을 받았던 7년8개월은 수용소 생활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지금 저는 죄인의 몸이지만 속마음은 다른 남한 여성들처럼 평범하게 살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책 제목은 그런 마음을 담은 것입니다』
○자유로운 삶이 희망
▶이제 인세수입이 수억원에 이르는 부자가 됐는데,부자가 되면 어떤 점이 좋을것 같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지만,저혼자 살아가는데 무슨 돈이 그리 많이 들겠습니까. 아직 인세를 받지 못했고 책이 얼마나 팔릴지 알수는 없으나 만일 돈이 생긴다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제가 걸어가야할 속죄의 길에서 책의 인세가 플러스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북한식 세뇌상태에서 깨어나 당신이 정상적으로 사물을 보기까지 얼마나 오랜시간이 걸렸습니까. 통일이 되면 북한인민들은 쉽게 세뇌상태에서 깨어날것 같습니까.
『바레인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중국말 일본말만 하면서 버티던 8일동안에 저는 이미 김일성의 세뇌에서 깨어나 있었습니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저를 데리고 외출하여 서울거리를 보여주고 TV를 보여주는 동안 저는 남한이 우리가 해방시켜야할 굶주리는 나라가 아니고 상당한 자유를 누리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만일 죄인의 몸으로 오지않고 한 젊은이로서 서울에 왔다면 그보다 빨리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김일성의 세뇌로 무장이된 인민일지라도 서울에 와서 슈퍼마켓에 한번 가본다면 다 주저않을 것입니다. 고층건물을 보고 놀라지는 않겠지만 풍부한 생활물자를 보면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북한은 동독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폐쇄적이기 때문에 당장 우리가 독일식으로 통일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쓰러지면 인민들은 굉장한 사상적 혼란을 겪게되고 어이없이 무너질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회주의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합니까.
『공산주의란 이론에 불과했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상·경제·생활면에서 인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잘 사는 것이 어떤 주의의 최종목표라면 지금까지의 시험결과로 볼때 자본주의가 우월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공산국가들이 지금이라도 깨닫고 변화하는게 다행입니다. 북한도 결국 어쩔수 없이 개방하고 변화할 것입니다』
○유족 슬픔에 큰 고통
▶서울에 온후 가장 괴로웠던 일,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
『3년반동안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가장 괴로웠던 때는 서울에 와서 진실을 털어놓기까지의 8일간,그리고 처음 재판정에 나가던날 울부짖는 KAL기 사망자 유족들과 대면하던 때 였습니다. 자백 하기전 8일동안은 제 인생에서 가장 갈등이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혁명적 의리,가족이 당할일 등을 생각할때 죽으면 죽었지 진실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재판정에서 유족들을 보기전까지 나는 막연히 내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했을뿐 KAL기 폭파를 내 눈으로 보지못했기 때문에 실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내 남편,내 딸을 살려내라고 몸부림치는 유족들을 보자 저는 제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무섭고 용서받을수 없는 일인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보람있었던 일은 저의 증언으로 일본인 「리은혜」의 신원을 밝힌일,그리고 제 책을 읽은 독자들과 신앙 간증을 들은 기독교 신자들로부터 따뜻하게 격려해주는 편지를 받을때 입니다. 한 여자분은 제 간증을 듣고 자신의 금쌍가락지를 빼어 선물로 주셨는데,가끔 꺼내보며 고마움을 느끼곤 합니다』
▶자신이 북을 배반했다고 생각합니까.
『자백하고 나서도 오랫동안 심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꼭두각시로 살아왔다는 것을 이제라도 깨닫고 인간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북에 있을때는 김일성의 은혜와 혁명적 영웅심에 스스로 감동하여 눈물흘린 적이 많지만,얼마전 TV에서 북한 인민들이 눈물흘리는 장면을 보자 소름이 끼쳤습니다.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세례를 받았는데 어떻게 기독교 신자가 됐습니까.
『여의도침례교회 한기만 목사님이 저를 찾아주신 것은 사건발생후 1년2개월쯤 지난 89년 1월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신적 여유도 없었고 목사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만드셨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저는 속으로 웃었고,하나님은 어떤 죄인도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을때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죄를 안짓게 하셔야지 왜 죄를 짓게 하신후 용서하시느냐」고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믿든 안믿든 매주 찾아주셨는데 6개월쯤 지났을때 저는 목사님 말씀을 차츰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고,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제 경우를 보더라도 자살하려고 독약을 깨물었는데 죽지못한 일,그처럼 엄청난 죄를 짓고도 살아있을수 있는 일 등이 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할때 가장 편안
▶신앙을 가진후 어떤점이 달라졌습니까.
『하나님을 믿기전에는 갈등과 번민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것 같았습니다. 제가 지은죄를 한탄하고 제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면서 삶의 의욕을 가질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의 슬픔 고통 희망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기도하면서 위안과 힘을 얻고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편안한 시간입니다』
▶좋아하는 성경구절과 찬송가는 어떤 것입니까.
『지금까지 구약·신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서너번 읽었는데,자주 외우는 것은 야고보서 1장2절∼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괴로울때 외우면서 큰 위안을 얻곤 합니다.
찬송가는 「나같은 죄인 살리시니」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를 좋아합니다. 연약하고 힘들게 걸을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해준다는 가사를 생각하면 힘이 됩니다. 얼마전 외할아버지의 사촌동생되시는 할아버지를 이곳에서 만나 이얘기 저얘기를 듣는중에 저의 어머니가 기독교계통 학교인 호수돈여고를 나오셨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는데,그후 어머니도 저를 위해 기도하시리라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기도속에서 늘 어머니를 만나고,부디 부모님이 통일될때까지 오래사셔서 다시 만날수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가장 힘든 싸움은 무엇입니까.
『제 죄를 잊어야한다는 것이 가장 힘듭니다. 사면을 받았을때는 기뻤고 이 사회에 적응해서 새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이것저것 열심히 배우려다가도 죄인인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남들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줄까라고 생각하면 용기와 의욕이 사라지곤 합니다. 남한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도 어렵습니다. 오래 몸에 밴 북한식 사고방식으로 거부감이 생기는 일들도 있습니다. 너무 자유분방한 것,자기 잇속만 차리는 개인이기주의,낭비와 사치 등을 보면 거부감이 생기고 제가 그런일들을 소화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두렵습니다』
▶북에서 귀순해온 사람들을 만나면 도움이 될것 같습니까.
『김만철씨 일가를 한번 만났으나 다른분들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귀순해온 분들이므로 죄를 짓고 잡혀온 나와는 처지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김만철씨 일가를 보면서 너무나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온가족이 함께 이 사회에서 살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독서·음악감상 취미
▶서울에 와서 새로 갖게된 취미가 있습니까.
『북에서 읽지 못했던 세계명작소설들을 읽는것이 즐겁습니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죄와 벌」 등을 읽었고,요즘에는 선물로 받은 소설 「동의보감」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음악도 서울에 와서 처음 들었습니다. 평양에 있을때 「이름없는 영웅들」이라는 20부 대작 혁명영화를 봤는데,서울의 다방에서 남녀공작원이 「베토벤 5번」 음악을 신호로 접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친구들과 「베토벤 5번이 뭐냐」고 서로 묻던 생각이 납니다. 아직 잘 모르지만 모차르트 음악이 좋고,앞으로 더많이 듣고 싶습니다』
▶임수경·박성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임수경 학생은 직접 만나봤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떤점에서는 순진한 것 같았습니다. 북한의 실상을 끝까지 외면하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이곳 대학생들은 할말 다하고 자유롭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제가 북에서 대학에 다닐때는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것밖에 몰랐으니까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살았다. 또 미인이기 때문에 살았다고 말하지만,저는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고 믿고,하나님 뜻대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5년간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살아온 제가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남한사회에 어떤 직업들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을 찾아 일하고 싶습니다. 결혼을 하겠느냐,공부를 더하고 싶으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의 저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문제들입니다』<대담:장명수 편집국차장>대담:장명수>
□약력
▲1962년 북한 외교부 직원 김원석의 2남2녀중 장녀로 출생. ▲「딸의 심정」 등 선전정치영화 2편에 아역배우로 출연.
▲김일성종합대 예과 1년을 거쳐 평양 외국어대 일어과 2년 재학 중 로동당중앙위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으로 선발.
▲금성정치군사대학,동북리 초대소 등에서 7년8개월동안 해외특수공작원 훈련.
▲1987년 11월29일 바그다드발 서울행 KAL858기에 탑승 ,폭발물을 남겨둔후 중간기착지 아부다비에서 내림. KAL기는 버마상공서 폭발 1백15명 사망.
▲바레인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 89년 2월3일 기소. 90년 3월27일 대법원 사형확정. 90년 4월12일 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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