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같은 순종형 안되는게 목표” 술회/귀족·학벌중시 맹비난/“정치성무관” 강한 의욕「우리에겐 경제전쟁을 수행할 고위사령탑이 필요하다」고 반복해온 크레송 여사에게 그 직이 맡겨졌다. 프랑스 「대약진」작전을 지휘하는 그에겐 벌써부터 「잔다크」 「대처」 「불도저」 등의 별명이 붙어있다.
그러나 81년 크레송이 농업장관이 됐을때 그녀의 별명은 「향수풍기는 여인」 「붉은 머리의 파리잔」이었다.
크레송의 정치생애에 기억할 날은 75년 10월16일이다. 바로 이날 크레송은 중앙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30대의 무명여인은 지스카르 정권의 대외협력부장관인 피에르·알베렝과 샤텔로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맞선 것이다.
71년 에피네당대회에서 미테랑의주도로 좌파의 통합을 실현한 사회당은 이 선거구에서의 지지도는 미약했다. 미테랑은 로카르(전 총리)를 내세울까도 고려했지만 새로 태어난 사회당의 야심과 면모를 보이기 위해 신선한 크레송을 세웠다.
샤텔로에 일면식도 없던 크레송이지만 1차에 공산당을 누르고 지스카르의 장관과 결선에 나서는데 성공했다.
모든 신문과 텔레비전의 시선이 이곳에 쏠린 가운데 우파는 정권적 지원을 쏟아 넣었다. 결과는 47%대 53%로 크레송의 패배였다. 하지만 크레송은 일약 유명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크레송은 83년 시장에 당선됐다. 좌파를 단결시키는 것을 보고 미테랑은 크레송을 「나의 작은 병사」라고 불렀다.
크레송의 미소뒤에는 「한번말한 것은 꼭 실행한다」는 전의가 담겨져있고 이점에서 크레송과 로카르는 대비된다.
농업장관시절 보수적인 농민들은 시위에서 「에디트여,귀하는 장관보다 침대에서 더 낫기를 우리는 희망한다」는 등 모욕적인 플래카드를 걸기도 했다. 인터뷰에서는 소가 무섭지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크레송은 『하나도 무섭지않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교통장관이 비행기를 잘 몰줄 알아야 더 유능한가고 반문했다.
90년 10월2일 유럽장관을 사임하면서 크레송은 『의욕없는 내각은 참을수 없다. 온건한 자본주의도 좋지만 독일과의 격차가 벌어지고 일본이 추격하는 상황에서 우유부단한 공론은 지겹다.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방대한 동원력과 결단력』이라고 미테랑에 사임서를 냈다. 그녀는 그 길로 슈네데르로 가서 몇달새에 미스퀘어 회사를 수십억달러에 구매하는 대형 거래를 성공시켰다.
크레송의 성장과정은 76년 출판된 자서전 「태양과 함께」에서 드러난다.
크레송은 고급공무원인 회계감사관을 지낸 아버지와 큰부자인 모친의 가계를 가졌다. 시아버지는 생페테르스부르그에서 러시아황제의 어의로 근무했으며 귀족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크레송은 어머니같은 여인이 되지않는 것이 목표였다고 술회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법 없이 모든것을 아버지의 의견대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59년 크레송은 나중에 푸조차의 국제담당 부사장을 지내는 자크·크레송과 결혼했다.
크레송은 영국인 가정교사에 의해 영어를 완벽하게 배웠다. 한데 그 가정교사는 불어가 서툴러 할머니는 물론 신에게까지 너(TU)라고 했다고 쓰고있다. 그런데도 배(선)는 아주 소중한 사람처럼 여성형으로 존중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국이 섬나라이고 배는 세계로 진출하는 불가결한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크레송은 풀이했다.
크레송의 잊지 못할 일은 독일점령시절,그녀가 병에 걸려 대피해있던 남부 시골집의 젊은 주인이며 레지스탕스 대원이었던 마르셸·렌츠가 체포돼 독일로 끌려간 사실이다.
이 처절한 경험이 크레송을 투쟁적으로 만들었다고 분석가들은 진단한다.
크레송은 65년 친구의 소개로 민주사회좌파연합(FGDS)에 가입,미테랑 선거운동을 도왔으며 미테랑을 만나게 됐다. 믿을수 없지만 그녀가 미테랑의 운전수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크레송은 당지도위,집행위,전국위로 고속승진을 거듭,81년 사회당 집권시 농업장관이 됐다.
그녀는 독일에서 학벌이 없는 프랑스인 다니엘·괴데베르트씨가 폴크스바겐그룹의 2인자가 된 사실을 지적하면서 프랑스사회의 귀족적인 후진성을 맹렬히 비난하곤 한다.
따라서 당연히 크레송여사는 엘리트양성 코스인 ENA(국립행정학교) 출신을 싫어한다. 학벌중시를 프랑스 사회의 경직성의 한 원인으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크레송 여사는 여성으로서 처음 맡는 중책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정치를 성에 의해 판단할 수 없다. 여성총리의 지명은 결국 정치의 현실성과 언어의 정신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국가예산은 장바구니처럼 현실성을 갖는다는데 동의하지만 그것은 분배만의 문제가 아니라면서 고상한 의미의 정치는 추진력과 행동으로써 국가에 존재하는 다양한 잠재력의 지렛대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크레송 총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영국의 대처처럼 보는데 대해 대처처럼 분명하지는 않다면서 그러나 대처처럼 자신도 놀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유럽장관시절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물음에 프랑스에서는 앞으로도 1백50년을 기다려야할 것이라며 자신과 사회의 현실을 알아야한다고 크레송은 말했다. 그러나 90년 해리스 여론조사에서 프랑스인의 86%는 여성대통령에 반대하지 않으며 그 직책에는 시몬·베유 전 EC의회의장 38%,미셸·발자크 전 하원의원 21%,크레송 12%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사생활을 빼곤 남자가 하는 모든 일을 여자가 할수있다고 믿는다」는 크레송이 총리로 나섰다. 프랑스 언론들은 「대통령이 되지않을 총리가 가장 유능한 총리」라고 지적하고 있는 가운데….<파리=김영환특파원>파리=김영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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