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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전 오늘/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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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전 오늘/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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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백일몽 같은 11분」이었다. 38년전 오늘,판문점현장을 지켜본 신문기자 최병우(후에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58년 대만해협에서 순직)는 그의 기사 첫마디를 이렇게 쓰고 있다.『백일몽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특히 우리 한국에게는 너무도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군장교는 한사람도 볼수없었다… 쌍방대표(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남일) 사이에는… 가벼운 목례조차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종막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이 「기이한 장면」에는 곡절이 있다. 당초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는 양측의 최고 사령관­김일성과 팽덕회,그리고 클라크 대장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한다는 잠정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측은 그 조건으로 한국군 관계자의 조인식 참석을 거부한다는 등의 생떼를 써서 그 합의를 깼고,끝내 김일성과 팽덕회는 평양에서,클라크 대장은 문산 미군기지 극장에서,따로 따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최기자가 언급한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군장교」 최덕신 소장(정전회담 대표)은 그날 문산 기지극장,바로 클라크대장 뒷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휴전에 반대하는 이상,휴전협정의 서명은 물론,한국대표의 조인식 참석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휴전반대를 빌미삼아,미국으로부터 한미 방위조약과 막대한 군사·경제원조를 약속받은 마당에,미국의 요청을 아예 무시하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최소장을 문산까지만 보낸 것이다.

이런 곡절을 겪으며,37개월에 걸친 전투와,24개월에 걸친 휴전협상으로 점철됐던 「기묘한 전쟁」의 불꽃은 일단 꺼졌다. 그렇게해서 「최종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때까지」(휴전협정전문)로 못박고,3개월내 정치회담을 열기로(동4조6항)했던 기한부 휴전협정으로,전쟁사상 유례없는 무기한의 휴전이 시작됐다. 이에 이르는 곡절들은,38년전 최기자의 지적대로 「모든 것이 상징적」이다.

휴전협정은 이 땅의 분단을 완성했다는 뜻에서 비극적이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사실상의 평화공존」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싫거나 좋거나,우리는 그 휴전체제에 의지하여 목숨을 이어왔고,앞으로의 평화정착이나 통일과업도 여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38년전 판문점의 「기이한 장면」은 우리가 이 휴전체제의 간접당사자로 되었음을 상징한다. 평화협정의 대미 직접협상을 주장하는 북한의 트집이 이것이다.

반면에 휴전협정이 가져온 「사실상의 평화공존」이란,따지고 보면 종이 몇장 위에 쓰인 「지상의 평화」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것이 휴지로 변하지 않은 까닭은 오로지 남·북간의 군사균형뿐이었다. 그 균형의 지렛대가 한미 안보체제였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한다면,38년전 이대통령의 휴전반대 외교를 무조건 무모했다고만 할수는 없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그 휴전체제나 한미 안보체제 모두가 재편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남·북한이 유엔에 함께 들어가고,고위급회담에서 어떤 합의를 도출할수만 있다면,구체적으로는 북에서 주장하는 불가침선언과,남에서 주장하는 3통(통신·통행·통상) 협정을 묶을수가 있다면,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계기가 마련된다. 요즘 남과 북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그런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

한미 관계에서도 변화의 조짐은 뚜렷하다. 정전위 대표의 한국군 장성임명,휴전선으로부터의 미군 철수방침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조치들을 통하여 남·북의 간접적이던 군사관계는 직접적인 것으로 바뀐다. 또 우리측에 대한 북의 「당사자 능력」 시비를 잠재울 수가 있다. 이 역시 이 땅의 평화체제를 위해 꼭 있어야 할 변화들이다.

이렇게 하여 「기이한 전쟁」은 바야흐로 청산단계가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남·북한 관계가 그리 쉽게 그 「기묘한 전쟁」으로부터 해방될수는 있을는지는 의문스럽다. 6·25에서 7·27에 이르는 그 모든 일들을 역사속에 묻어 버리기에는,그 「기묘한 전쟁」은 너무나 생생한 현실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기묘한 전쟁」 「기묘한 장면」에 이름을 냈던 사람중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김일성뿐이다. 그 「기묘한 전쟁」을 일으킨 그에게,38년전 오늘은 무슨 뜻을 지니는 것일까. 휴전 37년을 맞기 전날인 작년 7월26일 「로동신문」은 그에게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란 칭호를 올리고 있다. 한 페이지를 거의 다 차지한 그 장문의 기사는 38년전 그 때와 마찬가지 『위대한 승리』를 거듭 뇌고 있다. 지난달 6·25 41돌에는 20만명이 모인 「투쟁의 날」 군중대회 기사를 「로동신문」 3페이지에 걸쳐 싣고,적개심어린 우호를 나열해 놓고 있다. 이야말로 생생한 현실이 아니겠는가.

「기묘한 전쟁」의 역사를 쓰면서,책 이름을 『이런 전쟁』이라 붙였던 미국의 T·R·페렌바흐는,그 책의 종장 「한국전쟁의 교훈」을 이런말로 맺고 있다.

『인간이 망각한다는 것은 항상 위험한 일이다. 한국전쟁의 교훈은 그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있다』

분명 휴전체제는 해체되어야 한다. 해체가 이미 시작됐다고 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해체작업이 불발탄을 해체하듯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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