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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의 2인자로 “물질적 지주”/유병언 세모사장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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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의 2인자로 “물질적 지주”/유병언 세모사장 누구인가

입력
1991.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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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5단… 전경환씨와 친분/「지혜자」 명성… 교회서 수차례 강연(주)세모 유병언사장(50)의 면모가 검찰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점차 밝혀지고 있다.

유사장은 41년 일본 경도시 우경구에서 출생했다. 일제시대에 고향에서 파출소를 불질렀다는 오해를 받아 17세때 일본으로 피한 유씨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며 유씨를 유복하게 키웠다.

6살때 가족과 함께 경북 의성군 안평면 마전동 고향마을로 돌아온 유씨는 중학교에 가기위해 현재 본적지로 돼있는 대구 중구 동인동3가 361의1로 옮겼다. 유씨는 대구 S중과 S고를 다니면서 항상 윗주머니에 못을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고 감동적인 시를 읊조리며 눈물을 흘리는 문학소년이면서도 틈틈이 익힌 태권도 실력이 발군이어서 많은 무술인들을 사귀었다.

1백60㎝ 정도의 단신인 유씨는 최근에도 주변사람들 앞에서 1백80㎝ 이상되는 거구의 비서를 세우고 돌려 차기로 발이 얼굴부위까지 오르는 시범을 보일 정도를 태권도 실력을 갖고 있다. 지난 68년 공인5단을 땄다. 바로 이 때문에 같은 대구에서 합기도·유도를 하던 전경환씨와 「무술달인」으로 알게돼 5공 시절 권력층과 밀착,특혜를 받았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나 본인은 극구 부인하고 있다.

유씨는 61년 현 구원파 교주인 권신찬목사(68)를 만나면서부터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을 맞았다. 59년 고교졸업후 잠시 장로교회에 다녔던 유씨는 특유의 화술로 기존 기독교의 부패상과 교리의 잘못됨을 지적했는데 이때 캐나다 선교사 케이스·글라스의 눈에 들어 비슷한 취지의 종교운동을 벌이던 권목사를 소개 받은것.

유씨는 이후 권목사와 함께 평신도 운동을 벌여 교세를 확장시켰고 조그만 사업을 하며 약간의 재산도 모았다. 권목사의 신임을 받은 유씨는 66년 권목사의 딸 권윤자씨(48·보전신용협동조합 이사·양장점 경영)와 결혼,2남2녀를 두었다.

72년 경영난에 빠진 극동방송국에 자본금 26%를 투자,부국장으로 들어간 유씨는 전파를 통해 「평신도 운동」을 계속하다 권목사와 함께 교계로부터 이단으로 지적당해 곧 방송국을 나왔다. 이어 76년엔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삼우트레이딩이라는 오퍼상에 담보를 빌려줬고 이 회사 경영진들이 빠찡꼬 사업과 관련,탈세혐의로 쫓기자 자신이 직접 경영에 뛰어들었다.

유씨는 우선 은행의 융자를 받아 일본으로부터 자수기계 3대를 들여왔는데 중동 등지로 전량 수출한 기계자수가 호평을 받아 곧 봉제,페인트 등으로 업종을 다양화 시킬수 있었다.

유씨의 사업참여에 대해 유씨의 측근이었던 한 구원파 교인(30)은 『유씨가 권목사로부터 「기름부은 자」라는 등 적극적인 비호를 받으면서 「구원받은 사람끼리 모여서 일하는 하나님의 성지를 만들자」며 교인들의 참여를 요구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교회의 헌금은 모두 유씨의 사업자금으로 들어가고 유씨는 정신적인 지주 권목사에 이어 물질·재정적인 지주로서 구원파의 2인자로 인식됐었다고 밝혔다.

유씨는 「기름부은자」 「지혜자」의 명성에 걸맞는 화술로 구원파 교회에서 여러차례 강연을 했다.

그러나 유씨는 『지난 80년 9월 아버지가 돌아 가실때 장례형식과 절차에 관해 구원파와 갈등을 빚어 결별했다』며 『최근 나도는 세모­구원파의 관련설은 왜곡』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유사장의 사업은 81년 종이비누,82년 유압식보트 등 기발한 발명으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유씨는 25개의 세계적 발명특허와 4백98건의 공업 소유권을 창안,주목받는 기업인이 됐으며 이 덕분에 당시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인 전경환씨와 전두환 전대통령과도 자주 대면할수 있었다.

유씨는 전 전대통령을 만나 『한강을 살리자』고 제안했고 그 방법을 전 전대통령이 묻자 ▲한강모래를 파 88고속도로를 건설할것 ▲고수부지를 조성할것 ▲유람선을 띄울것 등을 제안했다는 것이 유씨 주변인들의 증언이다.

유씨는 79년 유휴인력을 수용하기 위해 태양열주택개발(주)을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82년 세모로 상호가 변경됐다. 그뒤 유씨는 86년 한강유람선 운영권을 따내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유씨는 한강유람선 제조를 위해 구원파 교인들을 대거 등장시켜 경제적 육체적 지원을 받은것으로 알려졌다. 세모의 지원을 위해 권목사는 『「한강작업」은 하나님의 일』이라며 교인들의 무보수 노동을 설교시간을 통해 독려했고 대학생과 많은 교인들이 낮시간을 이용,행주대교 근처의 선박제조장에서 배만들기 작업을 했다.

작업에 참여했던 이모씨(30)는 『권목사가 「한강작업」을 이스라엘 민족이 무너진 예루살렘성을 다시 쌓는 성스러운 일에 비유하며 참여를 종용했다』고 밝혔다.<김철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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