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9개월을 남긴 13대 국회의 막바지에서 국회의원선거법 개정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부상되고 있다. 이처럼 중차대한 정치문제가 14대 총선을 얼마 앞둔 현 시점에서 시간에 쫓기며 뒤늦게 논의된다는 것 자체가,졸속으로 점철되어 온 한국 의정사의 또 하나의 표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필자는 금년 2월7일자 본란에서 선거제도 개혁의 필요성과 그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최근 논의되는 세가지 선거제도 개혁방안(중·대선거구제/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의 혼합형/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대해 평소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한다.각당의 당론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나 대체로 현 정치권에서 관심을 피력하는 문제는 선거구 조정 내지 선거구 개편문제인듯 하다. 선거구 조정의 경우 기존의 소선거구제의 틀을 지키면서 다만 선거구간의 과도한 인구편차를 줄이기 위해 선거구의 증설을 해보자는 생각인데 이 방안은 실제로 정치쇄신 차원의 접근과는 거리감이 있는 발상이다. 따라서 많은 이의 관심은 오히려 민자당 일각에서 강하게 일고있는 「중·대선거구제」에 집중된다. 더욱이 민중당도 중·대선거구제를 지지하고 나서는 바람에 이에대한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시안을 표방하는 측은 선거구제 개정으로 소선거구제의 단점인 후보자간의 과열경쟁에 따르는 불법타락 및 금권정치의 폐해를 줄인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간 학계에서는 국회의원선거제도 개혁문제를 선거구제의 차원보다 오히려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대비하는 식으로 논의를 많이 해왔다. 한 선거구에서 한명을 뽑는 소선거구제는 바로 다수대표제의 전형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중·대선거구의 경우 한 선거구에서 여러명을 뽑으므로 결과적으로 얼마간 비례대표제적 성격을 띠는게 사실이나 그렇다고 중·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딱 같은 차원에서 논의하기는 어렵다. 우리 학계에서는 정당정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비례대표제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 강하다.
비례대표제는 득표비율에 따라 의석이 나누어지므로 대표성이 높고 지역당구조를 타파하는데 도움이 될 뿐더러 새로운 정치세력의 충원에 용이하다. 또 유권자들이 정당을 보고 투표하게 되므로 정치판에 많은 돈이 뿌려질 위험이 적다는 등의 장점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비례대표제로 옮겨가는데는 무리가 크므로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의 혼합형」을 채택하자는 의견들이 지배적이다(윤근식·양건·안병영 등).
언론인 박권상씨는 벌써 오래전부터 시·도단위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왔다. 그는 정당별 입후보자명부에 따라 일괄투표하는 경우,정당의 정강정책 및 공신력이 배려되고 아울러 정당이 내놓은 인물전체의 능력과 경력을 종합평가할 수 있으므로 개개인 후보자가 돈을 쓸 필요가 없고 따라서 금권정치의 망령을 퇴치할 수 있다는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어떤 선거제도나 따지고 보면 장·단점이 다 있다. 뿐만 아니라 선거제도는 각 정당·정치인 및 정치지망생들의 기득권과 정치적 이해관계와 깊이 연관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크다. 선거제도는 또한 정부형태와 연관되어 논의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른바 대권주자들이 이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정치권에 있는 당사자들은 대체로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높일 수 있는 제도를 정당화하는데 주력하는게 상례이다. 여기서는 위에서 제기한 세가지 논점을 객관적으로 하나 하나 따져보려 한다.
먼저 중·대선거구가 논의된다는 것은 소선거구제에만 안주하던 기존의 사고의 틀에서 일단 벗어났다는 점에서 하나의 발전이라고 볼수 있다. 이 경우 사표가 적고 진보정당의 정치권 진입이 용이하다는 등의 측면에서 준비례대표제적 성격이 농후한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인물선거의 측면이 부각될 뿐더러 복수공천의 경우 같은 정당후보끼리 경쟁하는데서 오는 후유증도 만만치않다. 무엇보다 중·대선거구를 도입한다고 해서 「돈 안쓰는 선거」로의 도정이 열리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오늘의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선거구가 커진다해서 입후보자들이 돈쓰기를 포기하리라고 생각한다면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다.
자칫하면 금권정치가 보다 넓은 터전에서 확대재생산될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특히 이 방안을 택할 경우에는 선거구의 확대에 따른 후보자의 인물 및 식견에 대한 홍보가 보다 긴요해지기 때문에 현재처럼 「입을 묶어 버리는」식의 선거운동에 대한 포괄적 제한규정은 당연히 삭제되어야 할것이다.
다음,장기적으로 비례대표제를 지향하되 당장은 지역구바탕의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병행하는 방안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도 구체적으로 다수대표제나 비례대표제가 어떤 형태인지,또 양자의 의석비율을 어떻게 나누느냐는 문제에서부터,정당명부 작성에 유권자의 인사를 반영할 것인지,반영하는 경우 어떤식으로 얼마나 반영해야 할지 등에 따라 실로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여러 가능성에 대한 연구 및 분석은 무엇보다 한국정치의 장기적 미래조망의 맥락에서 진지하고 치밀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권상씨가 제기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안은 이 땅에 정당정치의 토대를 세우고 금권정치의 망령을 패퇴시키기 위하여,또 지역당구조의 해소를 위하여 매우 의미있는 제안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아직 당내 민주주의는 커녕 정당내에 보스정치가 위세를 떨치고 있고 번번히 공천과정에서 금품수수가 문제되는 상황에서 후보자명부 작성을 정당에게 완전히 내맡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수 없다.
선거과정에서 후보자간의 경쟁은 완화되고 돈은 훨씬 적게들 것이 확실하나,자칫 정당차원에서의 과열경쟁과 부패현상은 오히려 심화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이 방안은 현재로서는 정당정치의 문화적 하부구조의 미숙때문에 시기상조라는 느낌을 떨칠수 없다.
선거제도 개혁문제는 크게 보아 비례대표제를 지향하는 맥락에서 보다 진지하게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거제도 개혁을 「돈안쓰는 선거」와 지나치게 연계시키는 것은 생가해 볼 문제이다. 돈 안쓰는 문제가 너무 강조되다 보니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바르게 반영한다는 선거의 제일주의 목적이 자칫 퇴색될 우려마저 없지않다. 오히려 돈안쓰는 선거를 위해서는,선거제도의 공영화,정치자금의 국고보조 확대,수지보고 및 공개 등 그것자체의 개선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데 일차적으로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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