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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조선문화」 탈고 재일동포작가 김달수씨(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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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속의 조선문화」 탈고 재일동포작가 김달수씨(초대석)

입력
1991.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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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고대사는 한반도 문화로 성립”/도래인,원주민 내몰고 「국가」 이뤄/신라신사·백제교등 곳곳에 「흔적」/호기심 시작이 21년 걸려… 황국사관등 변화일으켜 자부심(대담 문창재 동경 툭파원)재일동포작가 김달수씨(71·동경 중야구)가 「일본속의 조선문화」 12권째 원고를 탈고,21년 역작의 대단원을 맺었다.

제1권이 나온 70년 12월로부터 치면 21년이 걸린 셈이지만,이 대하시리즈의 모체가 되었던 「고려신사와 심대사」란 논문이 나온것이 63년이었으니 실로 30년 가까운 일월이 소요된 셈이다.

홋카이도(북해도)에서 오키나와(승충)에 이르기까지 일본전국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한반도 문화의 유적과 영향을 속속들이 밝혀낸 이 책은 그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특히 군국주의 시대의 황국사관을 바로잡는데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북·북해도편인 12권째 원고를 탈고한날 찾아간 기자에게 김씨는 『20년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취재와 집필에 몰두했었다』면서 이제는 본업인 소설에 정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우선 대단원을 맺은 것을 축하합니다. 20년 역작이라고 들었는데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소. 꼭 21년이 걸렸습니다. 63년 조양이란 잡지에 동경근교의 고마진자(고려신사)에 관한 논문을 게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관동지방의 한반도 도래문화 유적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일본속의 조선문화란 이름으로 단행본을 낸것이 70년말이니 꼭 21년 걸린 셈이지요. 그러나 그때는 시리즈로 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번호도 붙이지 않았는데 이것이 10만권이나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지방 기행을 시작했는데 계속 팔리는 겁니다. 쓰다가 보니 전국을 모두 돌아보자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21년 역작을 탈고한 소감은.

『좋지요. 기분이 안좋을리 있겠소. 처음엔 20년으로 잡았었는데 89년에 담석수술과 위궤양수술을 받느라고 1년이 늦어졌습니다. 공부도 많이 됐습니다』

○일본 독자들도 충격받은듯

­독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대단했습니다. 쓰면서 나도 놀랐지만 일본 독자들도 큰 충격을 받은것 같습니다. 일본의 교과서나 학자들의 논문에서 「귀화인」이란 말이 없어지고 「도래인」이란 말이 정착된 것도 이 책의 영향이라고 믿습니다. 소화일왕도 전두환 대통령이 왔을때 도래인이란 말을 쓰지 않았습니까. 황국사관이랄까,군국주의시대의 잔재라고할까,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부정하던 역사관이 많이 바뀐것도 자부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소설가로서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동경근교에 「고려」란 이름의 신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소박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문헌을 뒤져보니 관동지방 일대에 고구려군 신라군이 있었다는 겁니다.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지요. 깊이 들어가면 일본의 고대사는 한반도 문화를 빼고는 성립될수 없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일부에서는 무엇이나 한반도 문화에 결부시킨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있을겁니다.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잘모르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귀화인이란 말이 자취를 감춘것만 보아도 알수있지 않습니까』

­대충 계산해 취재일수는 얼마나 됩니까.

『현지답사가 한달에 10여일,지방강연이 한달에 두번정도였으니 취재에만 7,8년 걸림셈이죠,문헌을 뒤지고 집필하는 시간까지 하면 20년을 모두 이 책 쓰는데 바친 셈입니다. 그동안 본업인 소설을 거의 못쓰다시피 했으니까요. 한가지 특기할 것은 취재에 독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은 사실입니다. 내 책을 읽고 많은 독자들이 전화도 하고 편지도 해주었어요. 우리지방에 이런 유적이 있는데 한반도와 관련이 없는지 와 보아달라는 것입니다. 취재 비용도 제공하고 술도 밥도 사주면서.

○“고대일본은 한국 식민지”

교토(경도)의 한 의사가 「한국에서는 36년간의 식민지시대를 말하지만 고대일본은 통째로 한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느냐」고 한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일본의 지명이나 유적같은데 남은 한반도 문화의 영향은 어떻습니까.

『지명이나 다리 신사 등에 3국의 이름이 그대로 남은곳이 셀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동경근교에 고구려군 등이 있었으며 고려신사가 남아있는 것은 유명하지만 관서지방 구주지방은 물론 동북지방에도 수두룩합니다. 오사카(대판)에 가면 백제천 백제역 백제왕신사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요. 중심지인 신시이바시(심제교)는 신라교가 변한 말입니다. 오사카에도 옛날에 백제군이 있었는데,지금 재일동포들이 제일 많이 모여사는 이쿠노(생야)구가 옛날 백제군입니다. 남백제 소학교 백제교도 있습니다. 일일이 헤아릴수 없을 정도입니다.

구주지방에도 백제천 백제촌 등이 곳곳에 있고 동북지방 아오모리(청삼)에는 신라신사가 있어요. 동경서 남쪽 산악지방인 야마나시(산리)현의 80%를 차지하는 면적이 상거마 중거마 하거마하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는데 거마는 고마(고려)가 변한겁니다. 고마란 우리말 「곰」에서 유래한 것으로,일본에서 「감」 「가미」로 변했습니다』

○우리말 유래 헤아릴수 없어

­일본인들의 성에도 흔적이 남았다고 들었습니다만.

『고대일본의 성은 모두 지명에서 유래됐어요. 가나가와(산내천)현 하다노(진야)시는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들이 모여살던 곳이고,고대일본 최대의 성이며 권력자의 상징이었던 하타(진)씨가 도래인가계라는 것은 일본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것입니다. 구주에서 퍼져나온 하타씨는 702년 도요구니(풍국·현재의 복강·대분지방) 인구의 97%를 차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나가노(장야) 지방에 살던 고구려 도래인씨족 케루(괘루)씨가 스즈키(수수기·영목)로 개성했어요.

「괘루」 「상부」 「하부」 「전부」 「후부」 같은 고구려왕족의 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개성을 해달라고 청원해 스즈키같은 성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반도인들의 도래루트는 어떻습니까.

『제일 큰 루트는 역시 하카다(박다만)입니다. 지금의 후쿠오카(복강) 지방으로 해류가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루트로 구주에 상륙한 사람들이 세토나이카이(뢰호내해)를 거슬러 오사카지방에 터를 잡은 것이 야마토(대화) 정권입니다.

두번째로 큰 루트는 쓰루가(돈하) 니가타(신석) 등 일본 서쪽 해안입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해안에서 이쪽으로 해류가 연결됩니다. 이걸 보십시오. 지난번 니가타에 갔다가 바닷가에서 주워온 것입니다(김씨는 「포항 제5정영호」라 쓰인 그물 부기를 내보였다). 포항에서 해류를 타고 니가타에 떠내려온 것입니다. 일본 서해안에 상륙한 사람들은 육로로 나라(내량) 교토(경도) 등 기내지방이나 관동지방으로 진출했고,더러는 나가노같은 산악지방에 정착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아오모리같은 동북지방 서쪽해안입니다. 두만강 하구에서 떠나면 그 지방에 닿게 됩니다. 동북지방에 예상외로 많은 한반도 유물·유적이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철기문화가지고 대량이주

­도래인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고대에는 원주민을 남북으로 내몰고 도래인사회를 만들었지요. 아메리카 이주민들이 인디언을 몰아낸 것처럼 말이요. 유명한 고야마(소산수삼) 교수와 도리이(조거용장) 박사가 밝혀낸 것입니다만 조몬(승문)시대의 일본인구는 가장 많을때가 26만,말기에는 7만5천여명이었다고 합니다. 8천년간 계속되던 조몬시대가 끝나고 야요이(미생)시대가 되면 갑자기 인구가 59만4천여명으로 늘어나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농경문화를 가진 도래인들이 대량 이주해온 때문입니다. 그들은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까지 내몰고 구주를 중심으로 농경사회를 이루어 고대국가형태를 이룩합니다. 수도 많았지만 철기문화란 지금의 원자탄에 해당되는 위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당분간은 끝마무리에 바쁠것 같습니다. NHK에서 4,5일동안 현지 취재를 해서 여름 특별프로를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왔고,서울의 대원출판사에서 사진을 중심으로 이 책의 한글원고를 써달라는 부탁이 있습니다. 서둘러 끝내놓고는 소설로 돌아가야지요. 소설 태백산맥 속편을 쓰려고 수십년동안 자료를 모아왔는데 서울서 남부군이란 수기가 나와 못쓰게 됐습니다』

­젊어서는 공산주의운동에 열중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청춘을 다 바쳤습니다. 조총련에서 손을 뗀것이 60년대이니 그전까지는 조직운동에 온 정열을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남로당 출신들을 숙청하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저술활동을 못하게 하는겁니다. 테러도 많이 당했습니다. 81년 한국에 처음 간을 계기로 이제는 한국국적을 갖게됐지만 내자식은 아직 조선국적입니다. 비극이지요』

­서울은 자주 갑니까.

『한해에 한두번씩은 갑니다. 강연해달라는 청탁이 심심찮게 들어오니까요. 지난 2월에도 갔었소』<대담 문창재 동경특파원>

◎약력

▲1919년 경남출생

▲10세때 도일,일본대학 예술과 졸업

▲1947년 장편 「후예의 거리」 출간이후 「현해탄」 「태백산맥」 「행기의 시대」 「우리 아리랑노래」 등 소설 발표

▲1970년 「일본속의 조선문화」 1권 발표,현재까지 11권 간행

▲현주소 동경도 중야구 중야5의 52의15 브로드웨이 맨션 10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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