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의 과거 행적으로 미루어 이미 심증이 간 일이지만 고당 조만식선생이 총살당했음을 41년만에 비로소 확인하는 놀라움은 너무나 크다. 이같은 충격은 곧은 절개과 지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로 고당의 족적이 찬연해 후대의 흠모대상이 되고있는 사실과 함께 고당의 비극적 최후야말로 수많은 북한의 민주 양심세력과 납북인사들의 참담한 운명을 두루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생과 같은 탁월한 지도자들을 이처럼 비명에 가도록 한 이데올로기의 광풍에 얼룩졌던 우리의 최근세사가 새삼 가슴 아프고,반세기가 가깝도록 생사여부를 여전히 함구하고 있는 북한공산 정권의 반인륜적 자세가 더욱 원망스러워지는 것이다.고당의 최후가 한소수교와 함께 그곳 상주가 가능해진 신문사 특파원 추적으로 드디어 밝혀진것도 극적이라 할만하다. 그 특파원은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 등을 지내다 소련에 망명한 박길룡씨 등을 만나 북한이 6·25동란중 유엔군의 반격을 받아 평양이 함락되기 하루 전날인 50년 10월18일 평양형무소에 수감중인 기독교계 등 민족주의 계열인사 5백여명과 함께 조선생을 집단총살했고 두달뒤 평양에 되돌아온 북한정권은 가매장 시체를 파내 유엔군이 죽였다고 뒤집어 씌운 엄청난 사실들을 확인해냈던 것이다.
고당이 남긴 민족지도자로서의 발자취는 너무 뚜렷하다. 일제때는 독립운동가·교육자·종교지도자로 3·1독립운동·교육·물산장려·체육·언론활동 등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했고,광복후에는 주위의 월남간청을 끝까지 뿌리치고 남아 민주세력의 큰 지도자로 공산세력에 대항했었다. 당시 북한정권이 찬성했던 신탁통치를 끝까지 반대하다 연금당했던 고당은 그후 막연히 6·25동란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을뿐이었다.
지금껏 북한측의 함구로 생사가 불명이었던 인사가 어찌 고당뿐이었을까. 납북으로 가족과 집을 떠난 민세춘원 등 그 수많은 아까운 인사들이 이제는 유택도 없는 고혼이되어 북망산천을 헤매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앞선다. 휴전후 10만에 가까운 납북인사와 북한잔류 민주인사들에 대한 소식확인과 서신왕래를 우리가 얼마나 애타게 추진했었는지를 상기하면서 아직도 교류가 이뤄지지 않고있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국제정세도 바뀌어 남북이 유엔에 동시가입하고,화해·교류·공영의 길이 강도높게 도모되는 시점이다. 지금이라도 북한정권은 재북 및 납북인사들의 소식을 스스로 알려주는 자세를 갖출것을 간곡히 권고한다. 아울러 우리정부와 학계 및 민간단체에서도 생사확인 노력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해외에 흩어져 있는 박씨 등과 같은 인사들이 간직한 귀중한 사료 및 생생한 증언수집에 시기를 놓치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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