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 사건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은 과연 「대단한 존재」라는 것이 입증됐다. 국회의원 5명,청와대 보좌관·관료 2명 등 9명이 구속되고,서울 특별시장이 취임 1개월도 못돼 날아가고,노태우 대통령이 사과성명을 내는 등 한때 국정을 뒤흔들기까지 했던 이 사건은 글자 그대로 태산명동서일필로 끝났다.여론이 집요하게 이 사건에 매달렸던것은 검은 돈이 정치권력과 결탁,법의 자의적인 해석과 결정을 유도,부당한 폭리를 취득하는 정·경·관 등 3자유착의 「관행」이 이제는 단절돼야 한다는 시대적 소망과 요청에 따른 것이다.
이 소망은 검찰의 축소지향의 수사와 법원의 소극적인 법운영으로 증발했다. 사건의 주역인 정회장은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유착의 폭과 깊이 등 그 구조적인 뿌리가 드러나지 않은채 단순한 수뢰사건으로 처리됐다. 미국과는 달리 용감한 관련 제보자가 희소한 우리의 사회풍토에서는 수사권자인 검찰이 침묵하면 흑막이 더 밝혀질수가 없다.
여론이 실망하고 있는 단죄의 미온성은 검찰의 「성역수사」로 보아 사실 일찍부터 예상돼 왔던 것이다. 더욱 기가차는 것은 한보주택·한보철강 등 한보그룹에 대한 주거래은행 등 관련 금융기관 및 재무부 등의 구제조처다. 형사적인 단죄는 그래도 구색만은 갖추었다.
형식요건은 충족시켰다고 하겠다. 그러나 금융차원에서는 시종일관 구제를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2월초 수서사건이 표면화 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취한 일련의 구제조처는 미국의 걸프작전에 못지않게 절묘했고 또한 성공적이다. 여론이 분개하고 있는 것은 정태수 한보회장의 기업윤리 부재다. 부동산의 귀재인 그는 녹지지역 등을 헐값에 매입,이를 아파트 등 주택건설이 가능한 택지로 지목변경하여 황금의 성을 축성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파트·택지 등 부동산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폭등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지목변경에 성공만하면 땅짚고 헤엄치기가 되는 돈벌이다. 그는 정·관을 상대로해 이 연금술에 미끼돈을 아끼지 않고 살포,손이 큰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금융지원에서 정회장의 「검은손」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서사건 직전 한보그룹에 대한 순여신은 ▲한보주택 1천2백7억원 ▲한보철강 2천5백44억원 ▲한보탄광 3백73억원 등 총 4천1백24억원 등이었다. 문제의 한보주택 채무는 수서사건이 표면화된 2월초 은행 채무 1천2백억원과 26개 수서지구 주택조합에 주택건설 위약금조로 써준 1천14억원의 견질어음 등 2천2백억원. 한보 주택은 주거래 은행인 조흥은행과의 협의아래 견질어음중 2백억원의 만기가 도래하는 2월10일 하루전에 법원으로부터 법정 관리 신청에 따른 회사재산 보존처분 결정을 받아냄으로써 부도를 면하게 됐다.
한보주택은 벌어놓은 시간을 이용,지난 4월 주택조합측과 협상 끝에 원금 3백16억2천만원과 연리 15%로 3년간의 이자를 가산한 총 4백52억3천만원을 지불키로 합의했다. 한보측은 지난 6월21일 조흥은행·서울신탁은행·상업은행·산업은행 등 4개 은행들로부터 주택조합원에 대한 위약금 상환조로 한보철강 앞으로 모두 1백67억원을 신용대출 받았다. 이것은 역시 「특혜」라는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끝나지 않는다.
오는 7월말이나 8월에는 법원으로부터 법정관리 지정이 내려질것이 확실하다. 조은 등 금융단의 채무 1천2백억원 이상이 적어도 10년간은 동결된다. 한보철강·한보탄광은 현재 호황이다. 수익성 좋은 한보철강은 서울신탁은의 은행관리 아래 있다. 한보그룹은 불법과 비리에도 불구하고 기업인과 기업이 다같이 살았다. 금융지원 대신 기업인을 바꾼 정우개발의 사례와는 사뭇 다르다.
6공이 「비리기업인이 산다」는 악례를 남길까봐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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