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보석지 소상하게 게재/소압교도소 수용중 시집 여백등에 기록/진주만공격과 대미·만주국 관계등 밝혀/일본의 정당성 시종일관 강변태평양전쟁의 1급전범 도조·히데키(동조영기)는 일본의 전쟁도발은 1941년 11월 미국이 일본에 통보해온 이른바 「헐 노트」가 실질적인 대일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최후통첩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코델·헐은 그해 11월27일 ▲일본군과 경찰을 중국 및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전면철수하고 ▲중국에서 중경정부 이외에는 어떤 정권도 승인해서는 안되며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대해 당시 일본 군부는 물론 일왕이나 외무성 등이 모두 선전포고로 해석,12월2일 어전회의에서 대미 개전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지난 5일 발매된 월간 보석지에 실린 도조의 옥중기는 제1차 대동아전쟁 발발경과,대미교섭의 경위,진주만 공격전후의 분위기,만주국과의 관계 등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패전직후 연합군에 의해 1급전범으로 체포돼 오모리(대삼)수용소 스가모(소압)교도소에 수용중 시집의 여백 등에 빼곡히 쓴 도조의 옥중기는 철두철미하게 전쟁도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대미전쟁과 관련해 『지금 냉정히 지난일을 돌이켜 보면 반성할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중일전쟁의 발생원인에 대해 그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중국전역에서 배일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을 모독하고 일제상품을 배척하고 중국거주 일본인을 박해하고 일본의 권익을 침범하는 등 불법행위 때문이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중국과 함께 공존공영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의 리더십을 가지려는 것이 당시 일본의 생각이었다면서,그것을 제지한 미국과 영국에 맞서 생존권을 유지해야만 했다고 술회했다.
구미에 대한 그의 인식은 철저히 민족주의적이었다. 서구열강이 아시아의 이권 다툼에 열띤 경쟁을 벌이던 당시 상황을 그는 『동아의 땅은 구미대국의 식민지가 돼 착취에 울고 있다』고 표현하면서 『물론 지금까지 구미제국이 동아민족을 지도해준 것을 동아민족은 감사하고 그들의 권익도 존중하지만 동아의 땅은 동아민족의 근거지이므로 일본이 동아의 땅에 우선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좋지 않은가』라고 술회했다. 구미제국이 중국에서의 이권을 다투는 것은 안되고 일본이하면 괜찮다는 논리이다.<동경=문창재특파원>동경=문창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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