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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들의 행진/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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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들의 행진/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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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치가 있듯,수치가 있다. 셈이 약한 것은 고사하고,아예 숫자 감각이 무딘 사람들이다. 그들은,단·십·백·천·만까지는 괜찮으나,단위가 억을 넘고,조에 이르면,그 수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하지 못한다.도대체 수 자리를 잡는데,왜 단·십·백·천까지만 10진법을 쓰는지 알수가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만단위부터 시작되는,만의 만배가 억,억의 만배가 조,조의 만배가 경이라는 「만진법」이 그들의 수감각을 혼란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그들은 1억을 만만이라하고,10억의 중국인민을 한때 10만만이라했던 일은 알고 있지만,억과 억만이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언뜻 분간하지 못한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억자리를 넘어 조로 헤아리는 금액은 그저 천문학적이다. 그들의 수감각은 억조창생(수없이 많은 세상사람),억만장자(엄청난 부자)라고할 때의 언어감각과 다를 것이 없다. 「많다」 「무수하다」는 느낌뿐 구체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근래 그들이 읽는 신문지면은 별로 현실감이 없다. 뇌물도 먹었다 하면 억대요,아파트 한 채 값이 13억원이요,무슨 공약인지 공약인지도,발표했다 하면 몇10조원인것 모두가,그들에게는 다른 세상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니,요즘 시끄러운 신도시소동을 보는 그들의 느낌도 한정될수 밖에 없다. 정부가 엄청난 일을 시작해서,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것 같다는 감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아무리 수치라도,알만한 수치는 있다. 그 사이 신문들이 써제낀 그 많은 분량의 기사를 취사하여 남은,다음과 같은 수치들이다.

5공출범때 전두환 대통령은 5백만호 주택건설을 장담했다. 실적은 7년사이 1백50만호로 그쳤다. 한 해 20만호 남짓이다. 한자들 중에는 이것이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적정규모라는 견해도 있다.

6공 노태우 대통령은 대통령선거때 2백만호 주택건설을 공약했다. 한동안 잊은듯 했던 이 공약이 89년 부동산파동을 겪고 나서 다시 솟구쳐 나왔다. 그 주축이 수도권의 5개 신도시계획이다. 2백만호 주택건설계획의 경우 15%(29만호)를 감당할 이 신도시 투자규모가 총 15조8천만원,그 파급효과는 30조를 넘는다. 우리나라의 국민총생산(GNP) 1백31조원의 20%,40%에 가깝다. 그것도 남은 20∼30년 걸려 시행하는 신도시계획을 4년안에 끝낸다고 했던 것이다.

이 충격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아무리 수치라도 짐작할만 하다. 그래서 그들은 경제정책을 맡고 있는 수재들에게 묻는 것이다. 1백31조원 냄비에 15조원·30조원의 물을 부으면,냄비가 넘칠줄을 왜 몰랐소? 레미콘 사태가 나기전,건설과열이 경제제악의 근원이란 아우성을,왜 그리 오랫동안 모른척 했소?

물음은 이에 그치지를 않는다.

▷노대통령은 지난봄 서해안 개발에 23조3천억원을 투자한다고 했다.

▷이번 신도시계획의 기획부서라고 할 국토개발연구원은 2백60조원 규모의 국토종합계획(92∼2001)을 마련하고 있다.

▷7차 5개년 계획기간(92∼97)중 정부 각 부처가 요구하는 투자비(고속전철·고속도로·항만사업 등)는 1백8조원에 이른다.

▷이미 제한송전이 시작된 전력사정을 해결하자면 22조3천만원을 들여야 한다.

▷우루과이라운드에 대비하여 정부는 30조원을 농촌에 투자할 계획이다.

▷전국의 교통난을 풀기 위해 앞으로 10년간 56조를 투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사이 2백66조원의 손길이 생긴다고 한다.

또다른 수치도 있다. 역시 관변에서 나온 것들이다.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GNP 5%까지 늘려야 한다.

▷주택 2백만호 건설을 위해서 GNP의 6%를 투자해야 한다.

▷21세기를 위한 교육투자는 GNP의 4.7%가 되어야 한다.

▷과학기술투자에 GNP의 4%를 투자한다.

이 여러 수치는 연차적인 투자계획이고 중복도 있을 것이지만,엄청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만한 투자가 없이는 이 사회가 기능을 못할것 역시 틀림이 없다. 하지만,1백31조원 냄비가,과연 이만한 투자를 감당할 수 있을것인가. 이것을 하나의 딜레마라고 한다면,지금까지의 6공 경제정책에서,단적으로는 신도시문제에서,「수치들의 행진」을 거듭해온 관변수재들에게 그 해결을 맡길 수가 있을까.

수치적인 감각으로 생각할 적에,이 문제를 해결할길은 다음 세가지말고,달리 있을수가 없다.

그 첫째는,양입계출의 원칙이다. 모든 투자는 우선순위와 완급을 가려 가용재원한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경우 국민적 합의없이 강행되고 있는 경부·동서 등의 고속전철,대전엑스포,통일동산따위 기념비적 사업이 먼저 보류대상이어야 하고,마찬가지로 정부의 인건비와 경상비,그리고 국방비의 소요도 면밀하게 재검토 할수밖에 없다.

둘째,그렇게 하자면,정부의 정책행태가 바뀌어야 한다. 메모한장으로 신도시건설이 시작된다든가­ 하는 투의 느닷없음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절차를 밟아 의제를 설정하고,타당성을 검토하며,여론을 수렴하는 정도를 찾을때인 것이다.

셋째는 이런 대역사­자원의 배분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란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화의 의미는,이른바 대권의 향방이 아니라,우리 생활에 직결되는 정책의 향방에 있음을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이번 신도시가 일깨운 것은 그래서 소중한 일면이 있다. 냄비의 크기도 못재는 「수치들의 행진」을 멈추기 위해,수치들의 감시­정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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