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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대책위 갈등 새 “불씨”로/「성대 영결식」 싸고 양측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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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대책위 갈등 새 “불씨”로/「성대 영결식」 싸고 양측대립

입력
1991.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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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타계때도 시신 안들여/성균관/대성전앞 경찰은 왜 방조했나/학생측김귀정양 사망대책위원회가 10일 김양의 장례절차를 발표하면서 성균관대 금잔디 광장으로 시신을 옮겨 영결식을 치르겠다고 밝히자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유림,학교측이 적극 반대하고 나서 이 문제가 김양 장례에 미묘한 불씨가 되고 있다.

대책위가 성대 총학생회측의 안을 전폭 수용,11일 발인식을 거친뒤 12일 상오9시30분 성균관대 금잔디 광장에서 영결식을 열기로하자 성균관측은 즉각 김경수관장(72)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성대에는 1천만 유림이 성지로 받들고 있는 대성전이 있어 6백여년간 한번도 시신이 교내에 들어온 적이 없다』며 자제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김관장 등은 대책위와 학교측 관계자 등 3명을 만났을때도 유림의 절대불가 방침을 밝혔다.

대책위측은 바로 옆에 대성전이 위치한 학교정문을 통과하지 않고 후문쪽으로 교내에 들어가거나 대성전과 5백여m 떨어진 도서관쪽 옆길 통과방안을 제시했으나 유림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림측은 개항후 지리멸렬해진 유림계를 해방이후 재정비한 성균관대의 설립자 심산 김창숙 선생이 62년 5월 타계했을때도 시신은 교문앞에 둔채 영결식만 교내에서 치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분신했던 성대 졸업생 최동씨의 장례도 영정만 교내로 들어갔었다.

유림이 우리나라 학정과 교화의 최고학부로 지칭하는 성균관건물은 조선태조 7년(1398년)에 창건,19세기초에 현재 모습으로 중건됐다. 1천2백여평에 35개 사당과 누각이 세워져 있으며 이 가운데 공자 등 18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성묘로 일컬어지며 주위에서의 어떤 흉사도 금하고 있다.

이중기 성균관 총무처장은 『학생들이 교내로 시신을 들여올 경우 전국 2백57개 유림회지부 소속 유림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실력저지하겠다』고 밝히고 11일 상오10시 재경유림 3백여명의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사태가 이처럼 심각해지자 장을병 총장은 공식언급은 회피하고 있으나 『학생들이 교내에로의 운구를 강행할 경우 유림에 책임을 지고 총장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동문들은 이런 사태를 우려,학생들을 설득하려하고 있으나 학생들은 『귀정이가 몸담았던 학교에 돌아와 영원한 성대인으로 남는 것이 본인의 바람일 것』이라며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5백여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10일 하오5시 금잔디 광장에서 열린 교수·학생 9인의 토론회에서도 교수들은 『학생들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나 유림과 대립할 경우 뜻하지 않은 사태를 초래,오히려 역작용을 가져올수 있다』는 견해를 표했다.

학생측 토론자들은 『대성전 앞에서 최루탄이 날고 학생들이 백골단에게 붙잡혀 끌려갈때 유림은 무얼했느냐』고 반문하며 영결식 강행은 김양의 민주화 의지를 전성대인에 심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말하고 있다.

양측의 대립에는 유교에 대한 학생들의 달라진 인식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균관대는 자칫하면 김양 장례문제로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을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하종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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