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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이 없습니까/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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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이 없습니까/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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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들,교수님들은 왜 말이 없습니까. 할말이 없는 것입니까, 할말을 잃은 것입니까. 아니면,입이 바르고 빠르던 교수들마저 교수님 사회의 「말없는 다수」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까.시정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처럼 소박한 물음을 묻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수님들의 말 없음을 의아해합니다. 「말없는 다수」가 「말없는 교수」들을 쳐다보고 있는 꼴입니다.

그런 가운데,간혹 들리는 몇몇 교수님들의 말이,그들을 당혹케 합니다. 그말들이 시정 상식으로는 언뜻 소화가 안되기 때문 입니다.

어떤 교수님은 달걀과 밀가루로 범벅이된 정총리의 얼굴에서 「6공정부의 자화상」을 보는것 같았다고 신문에 썼습니다. 6공정부가 일을 자초했다는 뜻이겠습니다. 옳은 지적입니다. 「말없는 다수」도 그만한 이치와 선후사정은 압니다. 그런 지적을 앞세워 설파한 내용이 구구절절 옳은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말없는 다수」가 참담한 상아탑 풍경을 보고,놀라서 입을 연다면,그처럼 남의 말하듯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저것이 우리 기성세대 모두­바로 「나의 자화상」아닌가­하지 않았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을때,남의일 같지 않다고 느끼는 시정의 상정이 그런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그들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교수님들의 고소대처에서는,처참하기까지한 그 얼굴이,바로 교수님들이 몸담고 있는 「우리 대학의 자화상」,바로 「교수님의 자화상」으로는 비치지 않았습니까­.

또 다른 교수님은 신문에 쓴 글에서 『왜 이리를 호들갑을 떠는가?』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일이 벌어진 바로 그 대학에 적을 둔 교수님이었습니다만,이 역시 옳은 지적일것도 같습니다. 무슨 경사가 났다고 호들갑을 떨겠습니까.

하지만,최소한의 윤리감정마저 짓밟힌 「말없는 다수」가,「저럴 수는 없다」고 분개하는 것이 호들갑입니까. 그래도 기성세대의 한사람이라고,이 역시 남의일만 같지를 않아서,「애비 잘못이다」 「어미가 잘못 키운 탓이다」­가슴치는 것이 그토록 경망스럽고 방정맞습니까. 교수님들 고소대처에는 그쯤의 한숨은 상달될 길이없는 것입니까. 거기에는 「잘못 가르친 탓」이라는 자책감쯤 깃들 곳이 없습니까.

또 어떤 교수님은,이번에도 『이데올로기적 선생노릇을 하려는 (언론의) 못된 버릇』이 나타났다고 나무라는 글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요컨대 언론이 편파·왜곡보도를 해서 학생들의 「흉악무도했다는 점」만을 부각시켰다는 지적이겠습니다. 언론학 교수님의 말이니,이 역시 옳은 지적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없는 다수」는,입은 없어도,눈귀는 멀쩡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텔리비전 화면에서 보고들은 광경이 사형·난동,반교육·반인륜·반지성·반민주의 난장판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아무리 신문인들,없는 사실을 가지고야 어떻게 「선생노릇」을 하겠습니까. 아무리 「말없는 다수」가 어리석기로서니,그런 「선생노릇」의 홀릴만큼 어리석기야 하겠습니까. 교수님들의 고소대처에서는 세상이 그렇게 내려다 보이기만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대학에 자식의 장래를 의탁할 수 밖에 없는,「말없는 다수」는 불안합니다. 이제 우리는 과격 학생들만이 아니라,교수님들도 걱정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의 물음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앞의 몇몇 교수님의 글에 나타난것이,과연 교수님들 사회의 공론입니까. 대학이 그 지경이돼도 시국대세를 말하는 그 대핍함과,대학의 강단이 짓밟혀도 분개않을 이유를 찾는 그 냉철함,오히려 그 분노를 남에게 돌리는 그 투철함이,과연 교수님들 모두의 것입니까. 아니면 말없음의 공론이 따로 있는 것입니까.

교수님들은 반드시 이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교수님들의 직분이 그것을 요구합니다. 말없음의 고소대처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요청의 강도는 지난 5월 시국선언을 내고 침묵시위까지 벌였던 교수님들을 향해 더 높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학생들과 재야에서 높이 들었던 그 거룩한 명분에 참여를 했으면,그 명분뒤의 현실에 대해서도 가부간 말을 해야 합니다. 죽음을 미화하고,폭력을 정당화하며,불법을 합리화 했다는 비판에 대하여도 응답을 해야하고,정치현실에 대한 대외발언을 서슴지 않았던것처럼,오늘의 대학 현실을 향한 대내발언도 서슴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와서 분명한 것은,교수님들이야말로 지금 대학사태의 당사자라는 것이며,교수님들은 거리의 「말없는 다수」와 같을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사자인 교수님들끼리의 말을 모으고,말이 안맞으면 토론을 하고… 그리하여 지금이야말로 시국선언 하나쯤 나와야 할때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대학마다 조직된 교수협의회는 이런때를 위하여 있는것이 아닙니까.

달리 말하면,이 요청은 엊그제 전국대학 총장들이 밝힌 시국인식,대학수습방안에 대하여,교수님들의 「예」 「아니요」가 분명해야겠다는 얘기가 됩니다. 총장들 상당수가 교수님들이 직접 뽑고 추천한 동료교수이니,좌할지,우할지 말못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또 「예」 「아니요」가 너무 분명해서 싸움이 나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백열된 논쟁이라도 가투보다는 낫고,그렇게 나온 교수님들의 공론이라면,학생들뿐 아니라 거리의 「말없는 다수」도 승복할 것 아닙니까. 이렇게되는 것이 민주화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5월을 돌아 보며,「말없는 다수」가 말을 할 때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말을 할 때입니다. 그앞장이 교수님들이어야 한다는 것이고,순조로운 민주화의 길은 그렇게 열려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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