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사는 현재의 교과서요,미래의 예언서라고 한다. 또 종교에서는 윤회생사라는 것도 있다. 중생의 영혼은 마치 수레바퀴처럼 전전하여 무시무종으로 돌고 돈다는 생사관으로,전생의 업보가 이승으로,이승의 업보는 저승으로 각각 연게된다는 것이다.그런데도 지금은 모두가 「과거를 묻지마세요」이다. 식물에도 뿌리와 줄기와 잎이 있기에 열매가 맺혀 씨앗도 생겨나는데,어쩌면 그처럼 가볍게 과거의 뿌리나 업보를 잊고 편리하게 살고들 있는지 신통할 지경이다. 생태계와 비교하자면 마치 오랜 유충시절을 보낸끝에 어렵사리 태어나 짧게는 두시간만에 허무하게 스러지는 하루살이 증후군에 빠져있다고나 할것인가.
우리의 6월을 호국과 보훈의 달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6·25와 현충일이 끼여있대서이다. 이 거룩한 달의 첫날 베티고지의 영웅 김만술씨가 국립묘지 유공자묘역에 안장됐다. 그런데 첫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장으로 치러진 이 영웅의 장례식 참석자들에게는 허무한 생각마저 들었다고 한다. 요즘의 소위 「민주열사」 장례식 같지않아 마냥 무관심속에 치러지는것 같아서였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38년전의 베티고지신화이고 보면 회갑을 못치르고 타계한 김씨도 당시엔 지금의 대학생 같은 젊은이였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같던 시절 35명의 소대원중 23명을 잃은채 중공군 3백95명을 사살하며 고지를 사수했던 한 사병출신 젊은이의 순수한 열정이 과연 오늘의 질주하는 거리에서도 올바로 이해되며 계승되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래서 장례참석자들은 그리도 오늘이 허무했을 것이다.
시·도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엄청난 돈바람에 중심도 없이 표류하고 있다. 40년 반독재투쟁을 자랑하는 큰 야당마저 추악한 낙하산식 금권공천에 반발한 의원들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독백하며 탈당을 불사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수모와 우여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른 우리 정치권이요 야당임을 생각하면 누구나 심경이 또 허무해지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나라를 잃었던 시절의 고통일랑은 뺀다해도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길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소리마저 들어야했던 창피가 있었다. 또 쿠데타·비상조치에 멍들고 한없는 눈물마저 씹어삼키며 오늘을 기다렸던 정치권이 아니었던가. 더러는 납치되어 현해탄의 수중고혼이 될뻔도 했고 사형선고마저 받았었다. 또 테러범의 초산세례에 억지 제명까지 당했고 차라리 죽어서 살아나겠다며 처절한 단식마저 불사해 쌓아온 투쟁과 신념의 경력들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6·29와 5공청산을 통해 민의앞에 무조건 항복을 스스로 선언했던 엊그제의 그 겸손과 재생의 다짐은 또 어디로 갔다는 것인가.
실력과 됨됨이에 아랑곳 하지않고 5억원내면 따놓은 당상격의 공천을 준다는 한심한 작태,독재가 물러나자 민주정치를 한다면서 사분오열 쪼가리나 내고,할일은 않으면서 그저 공권력이나 휘두르는 오늘의 우리정치권에서 과거의 뼈저린 교훈을 찾아낼 길이란 없다. 젊음들이 질주하는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인듯 싶다. 냉전시대의 절대논리가 사그라드는 마당인데 제손으로 뽑은 정권마저 폭력으로 뒤엎자고 제몸에 불을 질러대는 역풍속에서 총을 들었던 학도병의 정열과 스스로 질서유지에 앞장섰던 4·19정신의 편린을 찾아내기란 정말 쉽지않을것 같다.
또 거리에서 동동크림을 팔고 자전거로 쌀가마를 배달하던 시절의 창업정신을 오늘도 잊지않고있는 재벌이 얼마나 될것이며,밥한톨 버려도 천벌을 받느다고 했던 시어머니의 근검정신을 오늘에 물려받은 며느리도 두루 찾기 어려워진 세태인 것이다.
미국의 국립묘역인 앨링턴에는 남북전쟁당시 남군을 이끌었던 패군지장 로버트·리장군의 저택과 기념품마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고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상잔의 참상을 되풀이말자는 교훈과 장군의 인품을 오늘에 기리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맥과 전통을 이어받은 맥아더 원수는 『노병은 결코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는 명언도 남겼다. 노병의 육신은 사그라들지언정 그 노병들을 통해 쌓이고 계승된 명예·의무·조국애의 전통은 살아남는다는 위대한 신념의 토로였던 것이다.
미국사회에서는 최근 또 다른 노병의 발언이 사랑받고 있다고 한다. 퇴역을 앞둔 걸프전의 개선장군 슈워츠 코프가 바로 그 노병인데,그는 얼마전 모교를 방문한 자리에서 『위기는 위대한 지휘관을 부르고 그런 영웅은 오직 인격을 겸비한 능력에서만 탄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도 엄청난 가치혼돈속에 위기를 겪고 있다. 역사적 시운은 진정 오랜만의 중흥을 기약할수 있는 호기인데 안으로만 내연하는 갈등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의 저변에는 분명 「과거를 묻지마세요」 식의 자포자기적인 찰나에의 망집이 도사리고 있는것 같다. 이럴때일수록 각고면려로 능력을 키우고,영욕이 깃들인 우리 역사의 거울을 통해 품성을 연마한 새 지도자들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를 묻지마세요」란 낯두꺼움 대신 「과거일을 잊지마세요」 「그리고 앞날도 생각하세요」라고 모두에게 외치고 싶어지는 것이다.<논설위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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