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소련의 미하일·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의전상의 문제로 말이 많았었다. 밤에 왔다 밤에가는 손님이 어디 있느냐는 여론에 결국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에 떠나긴 했지만 방문지가 서울이 아닌 남단의 섬이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도착시간이 캄캄한 밤이었고 만찬이 자정을 넘겨 새벽참아 되었다느니 등의 뒷말들이 오갔던 것이다. 비례로 오해될 수도 있을 정도로 전통적인 의전의 상식을 애써 외면하는 듯한 이러한 고르비 특유의 스타일은 이미 1년전 샌프란시스코의 한·소 정상회담에서 경험한 바 있지만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보여준 고르비의 손님맞이는 퍽 인상적인 데가 있었다.지난 13일 루키아노프 최고회의 의장 초청으로 소련을 공식 방문한 박준규 국회의장을 맞이하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격식은 확실히 색다른 것이었다. 예정된 접견실에서 박의장 일행을 기다리게 한뒤 자신이 나중에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먼저와 앉아 손님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다.
주인과 손님의 정확한 「동시입장」이라는 연출이었다. 고르비는 자신의 집무실로부터,박의장은 대기실로부터 동시에 접견실에 나타나 악수를 나누는 것이었다.
접견실은 그의 집무실과 대기실 사이에 있었는데 집무실 문을 지키던 의전관이 대기실 문을 지키는 의전관에 신호를 보냄으로써 양쪽 문이 동시에 열리는 것이었다. 카메라맨들과 기자들은 미리 접견실에 입장시켰다.
대통령실은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최고회의 의사당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고 병사 1명이 대통령실이 있는 건물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을뿐 예상보다 단촐한 모습이었다. 고르비는 크렘린궁 안에서 기거하는게 아니라 자기집에서 이곳 대통령실로 출근한다는 설명이었다. 크렘린궁은 최고회의 의사당 내각청사 인민대표회장 등을 수용하고 있는 하나의 성인 셈이다.
사회주의 체제를 송두리째 흔들어 부수고 있는 주인공들은 모두가 번거로운 의전절차를 귀찮아하는지 폴란드의 레흐·바웬사대통령 역시 실용적이고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다른 공식 접견실로 안내될 줄 알고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박의장 일행에게 안내도 경호도 없이 혼자 불쑥나타나 꾸벅 절을 한뒤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곧장 회담의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런식의 뜻밖의 출현에 놀란 박의장 일행은 바웬사의 속사포식 언변과 그 보다 더빠른 여자의 영어통역에 또 한번 놀라야했다. 이에 질세라 박의장도 유창한 영어로 속사포식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접견이 끝난뒤 한국 국회대표단은 무엇에 흘린양 멍한 표정들이었다.
회담을 끝낸 바웬사는 바깥 길거리에서도 보이는 긴복도를 따라 혼자서 뚜벅 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대기실인지 접견실인지 모를 그 방의 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열려있어서 기자들은 물론,운전기사까지도 들락거렸다. 대통령자신이 밑바닥 인생을 산 노조출신이라 치더라도 너무나 파격적인데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샤바의 대통령궁은 지나가는 행인들도 밖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그저그런 단층건물의 하나로 보였다. 정문앞 군인보초옆에서 한 여인이 무슨 요구사항을 잔뜩 적은 플래카드를 안고 앉아서 시위를 하고있는 모습이 우리 눈에는 아무래도 대통령궁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무시무시한 권부의 대명사로만 알려져온 크렘린에 대한 인식을 고쳐야했고 대통령궁은 삼엄한 경비경호속에 묻혀 있어야한다는 사고방식도 다소 경직된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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