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사인선 “가스질식” “압사” 상반/목격자들 “과잉진압”엔 한목소리지난 18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의 장례와 2차 범국민대회를 끝으로 외형상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던 시국상황은 25일 성균관대생 김귀정양(25)이 시위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또다시 긴장국면을 맞고있다.
범국민대책회의는 이 사건을 강경대군과 권창수씨의 경우와 같이 공권력에 의한 살인행위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해 검찰과 경찰은 공권력이 김양의 직접사인과는 무관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지금까지 목격자 증언이나 경찰의 자체조사를 통해 당시의 현장상황은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된 상태이다.
사건당일인 지난 25일 제3차 범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자 하오3시30분께 성북구 삼선동 일대에서 화염병 시위를 벌인 2천5백여명이 퇴계로에 집결,명동성당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모두 15개 중대 1천8백여명을 퇴계로일대에 배치했다.
송파경찰서장이 지휘하는 5개 중대는 퇴계로4가 로터리에,서울시경 4기동대장이 지휘하는 5개 중대는 스카라극장앞에,성북경찰서 경비과장 지휘의 5개 중대는 퇴계로3가 극동빌딩로터리에 각각 배치됐으며 각 부대에는 간이진압복 중대(종전 사복체포조)가 1개 중대씩 배속됐다.
하오5시3분께 대한극장 앞길에서 5백여명이 시위를 시작하면서 삽시간에 1만여명(경찰추산 3천명)이 모여 이 일대 1㎞도로를 모두 점거하자 5시12분 경찰이 다연발최루탄 등을 쏘며 해산작전에 나섰다.
이때부터 30분가량 다연발최루탄 등 1천여발의 최루탄과 화염병,돌이 난무하는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5시30분께 성북서 부대와 4기동대 병력이 양쪽에서 협공,시위대를 필동로터리와 대한극장 사이로 밀어붙였고 거의 동시에 양진압부대의 간이진압복 중대가 「무랑루즈」 술집 앞으로 투입돼 연행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무랑루즈」 옆 골목입구에서 시위대 1백50여명이 완전포위됐으며 일부가 연행을 피해 좁은 골목안으로 한꺼번에 몰리면서 골목에 세워져있던 자동차에 부딪쳐 쓰러졌다.
이들이 다시 일어나 달아나려는 순간 골목안 6m60㎝ 안쪽 바닥에 김양이 엎드려 쓰러져 있는것이 발견되자 배광철군(22·성대 정외 1)과 김지훈군(21·공주대 국민윤리교육 4) 등 학생들이 김양을 업고 골목을 50여m가량 빠져 나왔으며 이곳에서 인근에 있던 널빤지를 구해 김양을 누인뒤 1백50여m 가량을 더 달려 진양상가 옆길에서 모신문사 취재차량을 발견,이 차에 옮겨싣고 백병원으로 향했다.
대책회의측은 무랑루즈옆 골목입구에서 포위되고 꿇어앉혀진 시위대를 경찰이 경찰봉으로 마구 구타하고 발로 짓밟는 등 심한 폭행과 함께 사과탄 수십개를 던졌으며 이로인해 김양이 최루탄가스에 질식했거나 폭행으로 숨졌을 것으로 믿고있다.
대책회의측의 이러한 주장은 하정림(19·덕성여대 전산 1) 서행숙양(20· 〃 불문 2) 등 목격자들이 『당시 시위대가 겹겹이 몸이 포개진상태는 아니었으며 곳곳에서 경찰의 구타에 의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고 최루탄가스가 좁은 골목에 꽉차 숨조차 쉴수없는 상황이었다』고 증언한데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검·경찰은 당시 현장의 최초 목격자들이 『20∼30명이 한꺼번에 넘어져 김양이 깔렸다』고 말한 점과 김양을 처음 검진한 백병원응급실 당직의사 서병조씨(30·일반외과)가 『김양의 무릎에 동전크기의 피멍과 얼굴의 피멍 등외에 별다른 외상이 없다』고 진단한 점,시위진압중 최루탄가스에 의한 질식사 사례가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쇼크에 의한 압사나 압박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사인이 어떠하든 경찰은 적어도 과잉진압의 비판을 면할수 없게됐다.
현장주변 목격자들의 진술과 함께 서울지역 대학신문기자연합이 공개한 현장사진에서 경찰의 폭행사실이 확인됐고 현장에 널린 신발,노트,안경,찢어진 옷도 진압상황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이충재기자>이충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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