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선 평균 1년… 행정불안/궁정·이이제이에 「좌시형」도/「단순교체」는 미봉… 구조적 문제 풀어야「인사가 만사」라는 비유처럼 통치권자의 일차적 국정 경영수단은 「사람 쓰는 일」이다. 통치권자의 「사람 쓰는일」중 대표적인 것은 행정부를 이끄는 내각의 진용을 짜고 변경하는 일,즉 개각이라 할수 있다. 대통령제의 경우 헌법에 임기가 보장돼 있어 내각의 안정성이 특징이지만,한국정치사에 있어선 이러한 보편적 원칙과는 달리 시대상황이나 민심동향과 맞물려 개각이 너무나 자주 이루어져 왔다. 이는 그만큼 우리정치가 격변을 겪어왔고,지금도 그 와중에서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산고를 거듭하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라 할수 있다.
이번 정원식 내각의 출범도 격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우리 정치사에 있어 개각이 갖는 특수성을 다시 한번 짚어보는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개각의 양면성◁
개각은 대개 민심수습이나 문책성격을 띠나 경우에 따라선 권부의 의도를 실현시키거나 「특정인물」을 배려하기 위해서도 이루어진다.
특히 80년대이후엔 민심수습 성격의 대폭 개각이 비교적 잦았다. 5공의 이철희·장영자사건,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최근 강경대군 치사사건 등으로 민심이 극도로 흔들릴때 개각은 정국안정과 심기일전의 묘약으로 채택되곤 했다.
사실 통치권자가 자신의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일종의 「결심」으로 인식되는게 사회통념이고,그 「결심」이 실천에 옮겨지면 흔들리던 민심도 『그만하면 됐다』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차원에서 개각은 민심통합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긍정적 기능을 해왔다.
그러나 한국정치사가 「개각사」라고 비유될 정도로 헌정의 나이터에 비해 내각개편이 지나치게 빈번히 이루어짐에 따라 생기는 역기능도 만만치않다.
국무위원들의 경질만을 개각의 개념으로 엄밀히 규정한다해도 1공화국 55번,허정과도내각(60.4∼60.8) 3번,2공화국 6번,5·16직후 과도기(61.5∼63.12) 17번,3·4공화국 47번,10·26직후 과도기 3번,5공 23번,6공 19번 등 개각횟수가 모두 1백70회를 웃돌고 있다.
멀리갈것없이 6공의 경우만해도 장관수명이 평균 1년을 넘지못하고 내무장관의 경우는 6개월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개편이 잦았다.
산업화 등으로 행정전문성이 요구되고 있어 신임장관이 소관업무 파악에만 수개월이 필요한 설정임을 감안하면 빈번한 개각은 행정안정성에 치명적 타격이 된다는 지적이 많다. 또한 잦은 교체는 소신있고 일관성있는 행정의 기회를 축소하고,권부의 눈치만을 살피는 「해바라기」 장관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측면도 있어 장기적인 국가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지적도 적지않다.
▷대통령의 개각스타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씨 등 역대대통령은 자기사람을 택하는데 있어 「충성과 통치방향」이라는 두가지 원칙에 충실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시대상황이 달랐고 통치권자의 성격과 국정목표 등에 차이가 있었기에,대통령의 개각스타일 역시 사람마다 독특했다.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조선조의 사람이고(1875∼1965) 군신유의라는 유교적 전통을 고수하던터라 각료임면도 마치 옛날의 왕처럼 독단적으로 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의 개각스타일을 「궁정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공화국 기간(12년) 동안 장관 1∼2명의 교체를 포함해 개각이 무려 55번이나 단행됐다는 사실은 이대통령의 「마음대로」식 인사를 잘보여주고 있다.
또한 총리로 썼던 사람을 내무장관으로 우그려뜨려 기용하는 파격도 서슴지 않았으며,정치세력을 형성지않은 사람을 선호하기도 했다.
대표적 파격인사로는 6·25전쟁중인 52년 부산 정치파동때 초대총리인 이범석씨를 내무장관에,초대외무장관인 장택상씨를 총리로 바꿔 기용한 것.
당시 야당은 힘을 합쳐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장면씨를 실권자인 총리에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대통령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위협하는 야당의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충성서약」을 한 장택상씨와 주중(대만)대사로 기운이 빠져있던 이범석씨를 재기용,돌파구를 모색한다.
장총리는 「죽음으로써 보답하겠다」는 서약대로 야당의 내각제 개헌안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발췌개헌안을 만들어 야당의원들을 연금시킨 가운데 통과시킨다.
이박사가 긍정형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은 주도면밀한 계산에 의해 개각을 단행하는 스타일.
그는 국민적 지지를 고려,두루두루 사람을 쓰는 모양새를 갖추면서도 핵심부에는 「혁명동지」가 아니면 비집고 들어갈수 있는 틈을 허용치않는 이중적 용인술을 써왔다. 그리고 권부의 핵에는 영남출신을 주로 등용해 지역주의 인사의 병폐를 만들기도 했다.
특히 한 인물에 권한이 쏠릴 경우 그 반대세력에게도 견제권을 허용하는 이이제이방식을 썼다.
이중적인 인사는 63년말 민선후 첫 조각에서부터 드러난다. 박대통령은 혁명세력의 강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때묻지 않은 거물」을 찾던중 언론·교육·경제계를 두루 섭렵한 최두선씨를 총리에 지목한다.
고사하던 최씨도 몸소 삼고초려를한 박대통령의 성의에 감복,「방탄내각」의 선두에 서게 된다. 그러나 최총리와 혁명주체세력간의 알력이 계속되었고 어느 정도 정권의 유화이미지가 형성돼간다고 판단되자 단 6개월만에 정일권씨를 총리로하는 대폭 개각을 단행한다.
혁명동지이며 박정권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을 어떻게 대했는가에서도 그의 2중적인 인사스타일이 극명히 드러난다.
71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몇차례 부침을 겪던 김씨를 총리로 기용해 선거를 치르면서도 김씨에 대응하는 4인방을 공화당내에 허용하는 식의 용인술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의 치밀한 인사방식도 72년 유신을 지나면서는 1인 지배체제에 걸맞게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외무행정의 길만을 걸어온 최규하씨를 김종필씨 후임총리로 임명한뒤 충성형 인사일변도로 장기집권체제를 구축해버렸다. 이와함께 차지철 경호실장의 독주를 허용하는 느슨함마저 보이다 이로인해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박대통령은 62년 실권을 장악한후 유신까지 10년동안 47번의 개각을 단행한 반면 유신이후 7년 동안에는 10번밖에 개각을 하지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집권의 「우연성」 때문인지 일반적인 인사패턴을 중시하기보다는 자의적인 인사권을 행사했다.
3허(허삼수·허화평·허문도)를 중용하고,40대의 서석준씨를 부총리에 기용하는 등의 파격성을 보이면서 철저한 직할통치를 계속했다.
그러나 김상협 총리를 기용하고 야권출신 인사들을 발탁하는 등 직할통치와는 다른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독단이나 파격과는 달리 「기다리는」 식의 개각스타일을 구사한다는게 중론이다. 그러나 인내형 개각은 여론을 충분히 수렴한다는 장점과 함께 인사의 요체인 타이밍에서 문제가 제기될수 있다.
특히 노대통령은 6공 출범초기 한때 조각과정을 언론에 공개하는 등 여론수렴의 모습을 보였지만 개각과 여론의 흐름에서 상관성을 찾으려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바람직한 개각상◁
지나치게 잦은 개각사를 반추해보고 산업화·전문화라는 시대적 변화를 감안한다면,이제부터는 개각에 있어 행정의 안정성에 보다 큰 비중을 두어야한다는 지적이 많다.
우리 통치형태와 유사한 대통령제하의 미국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제까지 3명의 각료만을 경질했다는 점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김광웅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는 『의원내각제와 달리 대통령제는 임기동안 안정적인 행정을 이끈뒤 그 심판을 선거를 통해 받는 것』이라고 전제,『지나치게 잦은 개각은 제도상으로도 적절치않고 통치권자에도 행정에도 국민에게도 모두 손해만준다』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빈번한 개각은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즉 시국불안의 저변에는 분배갈등,정치적 통합력 부족 등 구조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도,항상 문제해결의 순서를 「자연인 교체」에 맞추는 것은 미봉책이라는 것이다.
이와함께 「사람을 키우지않는」 정치풍토도 한 원인이 되고 있다. 몇몇 정치대부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고,차세대후보들이 이들 대부의 서슬때문에 제대로 커갈수 없는 분위기 등이 개각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측면이 크다.
그렇다고 마냥 개각을 하지않는 뚝심이 용인될수 없는게 우리 정치 현실이다.
개각요구가 제기되는 상황이 「무리수」 일때도 있지만 개각의 필요성을 권부 스스로가 제기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안정된 정치·행정을 창출하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함께 「사람을 키우는」 풍토를 조성한다면 잦은 개각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 길로 가는데는 권력,행정,국민 모두의 협력이 있어야한다는 점에서 정치후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가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이영성기자>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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