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년동안의 한국정치의 큰흐름을 보면 시기별로 구체적인 금을 굿기는 어려우나 뭔가 순환과정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대체로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우선 정치적 감수성이 떨어진 정부가 실수를 한다. 그 실수는 누적된 정책실패의 결과일 수도 있고 도덕성의 실추에서 비롯된 돌발적 사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실수가 국민의 정서를 크게 어지럽히면 이에대한 사회적 저항이 싹튼다. 급기야 재야운동권이 가두로 뛰쳐 나와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고 정치사회적 불안이 고조된다.이쯤되면 얼마전까지 정부의 실수를 힐난하던 중산층이 급격히 보수화되기 시작한다. 정부는 중산층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는것을 확인하면 일단 숨을 돌리고 움츠렸던 고개를 다시 올려 세운다. 오만해진 정부의 정치적 감수성은 또 떨어지고 다시 실수를 저지른다. 뒤어어 재야운동권이 거리로 뛰쳐 나오고… 이러한 순환,아니 악순환과정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풍선처럼 증폭되는 긴장을 안고 윤회하고 있다.
우선 이 모든 과정의 첫 발단은 정부의 실수인데,위와 같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큰 실수는 대체로 정권의 민주화지체 내지 개혁부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정치적 감수성이 떨어진 정권은 그 실수의 심층적 원인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바르게 감지하지 못하고 이를 적당히 호도하려 한다. 여기서 일은 오히려 꼬이고 문제해결의 적기를 놓치기가 십상이다. 이렇게 정치위기는 확산된다.
한편 정부실패에 대한 조직적 저항의 선두에 나선 재야운동권은 물실호기의 기세로 밀어붙인다. 역시 체제변혁이라는 비현실적 명제에 집착할뿐 정치적 감수성이 결여된 재야운동권은 급진적인 구호와 비합법적 수단을 거침없이 구사,이른바 <안정속에 개혁> 을 희구하는 중산층의 정서를 크게 해친다. 여기서 사태는 서서히 반전된다. 안정속에>
한국의 중산층은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이나 그들 기득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급진적 민중주의에 대해서는 대단히 방위적이다. 따라서 정치위기가 일정수위를 넘어 가두에서 폭력이 난무하게 되면 이들은 보수선회의 흐름을 탄다. 이들은 누적적 실수로 정치위기를 자초하는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나 위기를 변혁의 호기로 이용하려는 민중세력에 대한 불신에서 우선 상황이 가라앉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본의 아니게 정부의 우산 가까이 다가간다. 이렇게 이들은 스스로 변화의 지렛대구실을 유보한다.
급진 민중주의에 대한 의구심에서 중산층이 보수선회를 시작하면 정권은 다시 오만해지기 시작한다. 오만은 다시 실수를 잉태하고 실수는 새로운 위기의 발단이 된다.
위의 과정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시키거나 혹은 악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도처에 존재한다. 우선 정부가 체질화된 권위주의적 집권문화에서 벗어나서 민주개혁의지를 분명히 하고 정치민주화와 경제정의실천에 앞장섰다면 우선 악순환의 첫 고리가 마련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뒤늦긴 했어도 중산층의 보수선회가 시작한 시점도 개혁실천의 호기라고 할 수있다. 정부는 이때 우선 태풍 일과 후라고 한숨 돌려 기존의 대오를 정비하고 어줍잖은 반격에 나설 것이 아니라,때를 놓치지 않고 개혁을 서둘러 중산층의 표류하는 정서를 지정시키고 급진세력이 정치적으로 부상할 수 있는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여기서 개혁은 얼마간 선취적으로 추진되어야지 궁지에 몰려 불가항력적으로 실행하는 경우,자칫 정치적으로는 패배로 기록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재야 운동권도 기회만 있으면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정치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이 그리 슬기롭지 못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궤를 넘어선 급진적 행동은 중산층의 이반을 가져와 끝내 보수파의 선풍을 몰고 올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중산층과 공감할 수 있는 정치쟁점을 찾아야 할 뿐더러 가능한한 합법적 저항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는 경우,태풍일과후 운동권의 정치적 입지는 오히려 더 좁아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은 자신을 묶어 놓은 교조적 이데올로기와 폐쇄적 조직문화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중산층은 어떠한가. 이들도 악순환을 악화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을 점하고 있다. 만약 이들이 평소에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깨어서 정권의 비리와 정책실패를 감시하고 시시비비를 가렸다면 정권의 오만은 크게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공안정치의 어두운 그림자가 당장 내 몸위로 엄습하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시치미를 떼고 하루 하루의 일상속에 파묻혀 버린다.
또 정권에 대한 저항이 조금만 가열되면 재빨리 전열을 이탈하여 안온한 권위주의의 품속으로 달려가곤 한다. 오히려 이들이 민중세력의 급진화를 제어하며 시민문화의 차원에서 저항의 주도권을 거무쥘 수는 없는지.
위의 순환과정에서 제도권의 야당은 언급이 되지 않았다. 이들은 최근 한국정치에서 한낱 조역으로 자꾸 전락하고 있는 느낌이다.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싣지도 못하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분수령마다 주체적으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색한 몸짓으로 재야운동권의 뒷북을 치기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야당이 국민에게 정치적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늘 이들이 한껏 집착하고 있는 권력동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민생동기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의미에서 야당은 아직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위의 악순환 과정에서 정권,재야운동권,그리고 중산층,또 덧붙이자면 야당이 어긋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한국정치의 새로운 민주적 동태성을 창출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이 정치적 감수성이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구태의연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상황을 폭넓게 인식하고 한발앞선 입장에서 다른 집단의 처지를 바르게 또 가까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그것이 정치적 감수성이다. 우선 이 위기의 시점에서 그것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정치집단이 있다면 바로 노태우정부일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