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상오 서울 명동성당의 성모동산 앞에서는 강경대군 치사사건 이후 「치사시국」을 주도해온 범국민 대책회의가 20여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해온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명동성당 본당옆으로 장소가 바뀌고 대책회의의 명칭이 「폭력살인 규탄」에서 「민주정부 수립」으로 변경된것 정도였다.성모동산에 텐트를 친 재야인사,학생 등 7백여명은 매일 두차례 성당주변에서 선전전을 하면서 하오6시에는 결의대회를 여는 등 2단계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민주화운동의 메카」 「6월 항쟁의 성지」라는 애착과 믿음을 갖고 찾아온 명동성당은 이제 달라졌다. 현시국이 87년 6월과 같다고 믿는 대책회의측은 성당측의 태도가 4년전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5공시절에 민주화의 성지요 소도였던 명동성당은 6월항쟁 당시 구국단식농성을 하던 7백여명의 학생에게 온갖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정부당국을 설득,그들의 무사귀환에 기여했다. 그 이후에도 전교조교사,철거민,노점상 등 명동성당의 품에 뛰어든 사람들은 성당측의 배려를 받을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성당측은 대책회의가 옮겨오는 것을 극구 반대했을뿐 아니라 불청객을 내보내기 위해 단전·단수 등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려할만큼 거리를 두고 있다.
이미 89년 8월 도르래문을 설치,출입제한조치를 취했던 명동성당측은 평화방송 사태를 겪으면서 노조원 해고를 비난하는 재야와 상당히 멀어졌다. 5공시절의 이미지 또한 많이 퇴색한게 사실이다.
성당측은 지난 19일 새벽 시위대가 쇠파이프로 문화관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오자 분노와 불쾌감을 표시했다. 장소이용에 따른 양해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빚어진 난입행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당측은 불청객들을 내보내기 위해 공권력을 요청할수도 없고 가톨릭 내부의 목소리도 엇갈려 현실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하기 어려운 처지이다.
대책회의의 명동성당 농성은 학생과 특정 종교세력에 의지해온 재야의 투쟁방식 전환과 가톨릭 내부의 입장정리를 동시에 요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