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안정 큰 공헌… 최근 경제통합 싸고 대립/전유럽언론 대서특필… 마르크화까지 하락16일 사임계획을 밝힌 카를·오토·푀ㄹ 독일연방은행 분데스방크총재(61)는 「독일 마르크화 안정의 지주」이자 「세계금융계의 최고 실력자」로 지칭돼온 인물이다.
국제금융계서의 그의 비중은 지난 13일 처음 사임설이 나오자마자 국제금융시장에서 마르크화 가치가 하락했던 사실에서도 여실히 읽을 수 있다. 독일은 물론 전 유럽언론들도 푀ㄹ의 사임설을 대서특필,사태추이와 그의 사임이 가져올 영향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푀ㄹ총재는 16일 올하반기 사임계획을 공표하면서 「개인적 사유」때문이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오는 95년말까지 임기를 암겨두고 있는 그의 사임결정은 국내 및 대외금융정책을 둘러싼 콜총리 정부와의 오랜 갈등에서 나온 것이다.
현 야당 사민당(SPD) 소속인 푀ㄹ총재는 사민당 집권전인 80년 연방은행 총재에 취임,강력한 긴축통화정책을 견지해 마르크화가 치안정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이는 흔히 82년 집권한 콜 기민당(CDU) 정권의 최대치적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푀ㄹ총재와 정권으로부터 독립된 분데스방크의 공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푀ㄹ총재는 77년 자신을 분데스방크 부총재로 발탁한 슈미트 전총리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긴축통화정책을 폈다. 88년 집권연합내 기사당(CSU)의 거센 반대를 제치고 8년간의 2차임기에 취임한 후에도 독립적 통화정책을 고수했었다.
균형있는 감각과 신중한 처신으로 콜총리의 지지를 받았던 푀ㄹ총재는 그러나 89년 4월 테오·바이겔 CSU당수가 재무장관이 된 후부터 정부내 팽창론자들과의 노골적 갈등에 직면했다. 바이겔 재무장관 등 정치세력들은 「독일경제정책의 입안자」로까지 규정되고 있는 푀ㄹ총재로부터 통화정책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치열한 견제작업을 폈다.
이후 푀ㄹ총재와 콜정부는 특히 동독과의 경제·화폐통합을 둘러싸고 공개대립 상황으로 치달았다. 경제·화폐안정을 최우선 요소로 삼고있는 푀ㄹ총재는 동독과의 조기화폐통합 및 이른바 동독마르크화와의 「1대 1」통합에 극력 반대했으나 정치적 고려를 앞세운 콜정부는 이를 강행했었다.
이때문에 지난 3월 동독지역에서 경제적혼란이 야기되자 푀ㄹ총재는 정부의 정치적결정이 「파탄」을 초래했다고 공개비난함으로써 파문을 몰고왔었다. 가뜩이나 곤경에 처해있는 콜총리는 이때 푀ㄹ총재와의 「결별」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 경제정책과 관련된 갈등과 함께 유럽화폐통합 작업의 속도와 방식을 둘러싸고도 연방은행과 정부측은 이견을 노출해왔다. 푀ㄹ총재는 겐셔외무장관 등이 정치적 고려로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유럽화폐통합을 강행하려는데에 반대해 독일정부의 「유럽정책」에 커다란 걸림돌이 돼 왔다.
「평가자」가 아닌 「창조자」가 되기위해 경제전문 기자직을 떠나 70년 경제부 관리로 전직,브란트 전 총리의 보좌관과 슈미트 사민당 정부의 재무차관을 거쳐 분데스방크 총재에까지 오른 그는 다시 보다 「창조적」인 이력을 개척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를 국제통화정책상 독립적인 「제도」로까지 높게 평가하는 시각에서는 그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차기총재와 장차 설립될 유럽중앙은행의 총재직을 맡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푀ㄹ총재의 사임으로 독일의 대내외 통화·재정정책에 관한 연방은행의 독립성 약화와 정부의 정치적 입김 확대를 우려하는 견해도 없진않다. 그러나 그의 사임기사를 로카르총리 퇴진과 같은비중으로 다룬 프랑스언론 등 유럽 각국의 전문가들은 분데스방크의 기존정책에 큰변화는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푀ㄹ총재사임을 둘러싼 국제적 논란은 독일경제가 차지하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다.<베를린=강병태특파원>베를린=강병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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