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행진」 자취 시민들 무관심속 사라져/40년 압제·민진당 분열 민주화 걸림돌 작용대만이 민주화를 위한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지난 87년의 계엄령 해제와 88년의 야당 합법화 조치에 따라 급진전돼온 대만의 민주화과정은 30일로 예정된 이등휘총통의 민주개혁조치 발표로 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 하지만 지난 40여년간 지속돼온 대만인들의 「정치적 불감증」이 단시일내에 치유될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경제분야에서는 물론 통일작업과 민주화 과정에서도 한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만의 표정을 대북에 특파된 유주석 특파원이 훑어보았다.<편집자주>편집자주>
대북시내 나사복로(루스벨트거리)의 국립 대만대학 정문 일대는 「반대노적수헌」을 외치는 표어 플래카드로 어지럽다.
지난 18일 9명의 학생이 시작해 한때 20여명이 계속하던 정문앞의 단식농성은 24일 국민대회 임시회의가 「1단계」 헌법개정(수헌)안을 통과시키고 폐막된 직후 강제해산됐다.
지금까지 최대규모였다는 「4.17 가두대항쟁」의 흔적은 이제 국립대만대학 앞길에 표어와 구호로만 남아있다.
지나던 시민,더러는 구경삼아 나온 인파가 붐비지만 그들의 표정은 정치에 대한 오랜 무관심만을 드러내고 있다.
현지의 신문이나 TV에서도 학생 재야단체들의 동정에 관한 보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작년 7월 「국시회의」를 열게했던 민주화 시위의 진원지이자 이번 4.17 시위때도 집결목표지가 됐었던 「대북의 천안문광장」 중정기념당도 8일만인 지난 25일부터 다시 개방되고,북경의 엄청난 자전거행렬을 연상시키는 오토바이의 물결이 정치 무관심의 대북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28일 저녁6시반부터 대북교외 신장지역의 한 소학교 운동장에서는 「공민투표 촉진회」라는 재야단체가 주최한 「반대노적수헌 설명회」가 열렸으나 청중은 고작 몇십명 뿐이었다.
「채모」라고 성만말하고 좀체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는 40대의 한 이 단체회원은 시민들의 무관심을 아쉬워하며 『정치에 대한 대만 국민들의 무신경,대만사회의 병적인 「안정」 지향은 그들이 결코 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40여년 오랜 압제의 소산일뿐』이라고 그 나름의 해석을 했다.
국민당 정부가 「민생」 해결,경제건설에 치중해온 결과 대만은 이제 1인당 GNP가 8천달러(90년)를 넘고 외환보유고는 7백60억달러로 일본을 앞질러 세계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정치적 체념의 분위기도 장경국 전 총통 사망과 계엄령 해제로 시작된 지난 3년간의 변화를 통해 이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 채씨의 진단이다.
그러면서 그는 걸음마단계이긴 하지만 모처럼 깨어나는 대만 국민들의 정치의식,민주화개혁에 대한 소리없는 갈망에 제대로 불이 당겨지지 못하는 것은 대만의 특수한 사정을 생각한다하더라도 역시 야당과 재야개혁세력의 분열과 정치역량의 부족 때문이라고 자인했다.
야당 민진당은 내부 분열속에 당내 급진세력의 주장에 휘둘리는채 마치 대만독립(대독)의 극단적 움직임으로 돌아선 인상을 주어 「안정」에 집착하는 대만 국민들의 호응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대독」 주장은 국민당 삼민주의,그리고 총통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40여년 대만사회를 지배해온 금기중의 금기이다.
이와관련,대만 정치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한 한국인 유학생(30)은 국민당의 당가가 여전히 대만의 국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지적했다.
오는 5월1일부터 발효되는 「감란시기 임시조관」의 폐지에 따라 43년을 지속해오던 「전시체제」는 해제되지만 대륙의 공산당 정권을 적으로 간주하고 전체중국의 정통합법정부를 주장하는 「중화민국」의 구헌법과 반공의 입장은 현실로써 엄존한다.
대만인구 2천45만의 8할이 40세 미만이며 이들은 대만에서 태어난 사실상의 대만 출신들(본성인)이다.
그러나 아버지나 조부가 대륙태생이면 그 후손들은 호적상 어디까지나 「외성인」이 된다.
현재 본성인과 외성인간 인구비율은 대략 65대 35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본성인과 외성인이 근본적으로 석연치않은 관계이지만,통일이라는 대전제앞에 그리고 북경의 현실적 위협앞에서 대독주장은 본성인들 사이에서마저도 그 지지기반이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구헌법을 부정,「중화민국」의 법통자체를 부인하는 개헌이 아닌 「제헌」의 주장이나 「대독」 등 과격한 주장이 전면에 부각되면서 대다수 민심은 등을 돌리고 4.17 대항쟁도 결국 집권국민당의 일반적인 「1기관 2단계」 개헌 밀어붙이기에 제동을 거는데 실패하고 말았다.<대북=유주석특파원>대북=유주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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