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의 김일성은 북한 전역 80여곳의 별장을 전전하며 산다(한국일보 90·5·10·15면). 그런 별장 하나가 평안북도 영변,운산에서 발원한 구룡강이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 감은 산속에 있다. 평양 북쪽 90㎞쯤 되는 곳이다.미국의 첩보위성 사진은 바로 이 일대가 북한의 핵개발 단지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신문에도 보도된 그 사진은,별장으로부터 북쪽으로 강을 건넌곳의 연구용 원자로와 소형원자로,그 하류쪽 대안 산골짝의 대형원자로,핵연료를 만들어내는 우라늄 농축공장과,핵폭탄제조의 열쇠가 되는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보여준다. 이중 앞의 원자로 2기는 소련제,대형원자로는 프랑스제의 50년대 구형이며,84년에 착공한 대형원자로는 94년,재처리시설은 95년에 완공될 것이라 한다. 이 분석결과가 옳다면,앞으로 4∼5년 안에 북한은 한해 2∼3개의 나가사키형 핵폭탄 제조능력을 갖추게 된다. 김일성별장은 희한하게도 이 가공할 시설을 거느리는 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 대로는,작년 10월말 미국은 이 위성사진을 일본정부에 제시했다. 시기적으로 한·소수교,조·일교섭의 진전과 때를 같이한다.
그 무렵을 잠시 돌아보면,9월2∼3일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상은 평양을 방문,한·소수교를 통보했다. 북한의 김영남은 그에게 강력한 항의각서를 전달하고 이를 공표했다. 그중에 지금까지 조·소동맹관계에 의존했던 「일부무기」를 자체 생산하리란 내용이 들어있다. 그 「일부무기」가 무엇인지는 영변의 핵시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한 소련의 반응은 『자기가 서있는 다리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은 위험한 짓』이란 공청기관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9·22) 논평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같은달 26일 묘향산의 김일성별장으로 불려간 일본의 가네마루 전 간사장은,김일성에게 북한의 핵개발문제를 제기했다. 김일성은 핵폭탄을 『만들 생각도 없고,능력도 없다』고 잡아뗐다. 그 이틀 뒤 「하나의 조선」을 노래한 조·일 공동선언이 나왔다.
앞뒤 사정으로 보아,군기에 속하는 위성사진을 때맞추어 내놓은 미국의 의중은 분명하다. 북한 핵개발이 미칠 충격을 생각한다면,그것을 패권주의라고 나무랄 수는 없다.
이런 경위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걸프전쟁중에 새로 생긴 우수개 한토막이다. 그 줄거리는,소련사람이 『우리 무기가 괴물을 키웠다』고 하자,일본사람이 『그 무기 값은 우리가 댔다』고 했다는 것 뿐이다. 후세인에게 무기를 가장 많이 공급했던 나라,경협을 가장 많이 제공했던 나라를 꼬집은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북한의 핵개발 문제도 이와 비슷할는지 모른다. 소련은 북한에 핵시설과 핵기술,그리고 핵운반수단을 공급해 왔다. 가네마루유로 한다면,소련사람들이 저지른 일의 경제적 뒷마무리를 일본이 맡아 해주는 결과밖에 남을 것이 없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북한 핵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좀더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근래에 와서 남북간의 쌀=석탄직교역이 이루어질듯 하고,국회 IPU대표단의 입북길이 열리는 등,무언가 풀리는 듯한 조짐이 없지 않으나,이대로 시간을 흘려 보낸다면,갈수록 북으로부터의 핵위협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김일성이 핵폭탄을 개발할 『생각도 없고,능력도 없다』고 했다해도,85년에 핵불확산조약을 비준한 북한이,조약에 따른 핵사찰을 거부하고 있는 동안 착착 핵시설을 갖추어 왔고,그 가동이 몇해뒤로 다가왔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과 국가 존립에까지 관계되는,이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본다면,지금까지 정부가 보여준 반응은 너무나 안이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국내 일부에서 남한의 핵철거론,한반도 비핵화론이 제기되고 있으나,정부로서는 확고한 견해 표명 조차 있은 적이 없는 것이다. 아예 핵문제는 미·소 강대국간의 게임으로 치부했던지,북한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자는 배려를 한 것인지하는 의심마저 일 지경이다.
그러나 이제 북한의 핵이 남북관계의 핵심이 될 것은 틀림이 없다. 그것을 그냥둔채 어떻게 평화를 말하고 신뢰를 구축할 수가 있는가. 선결과제는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비핵화 논의도 그런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 북한의 핵은 결코 북한과 미국의 문제가 아니라,북한과 우리의 문제인 것이다.
정부는 이점을 분명하게 북한에 알려야하고 상응한 외교노력을 펴야한다.
그 첫째는 일본이다.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하지 않는 한 일·조 정상화나 경협이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도록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 관한한 7·7선언의 모양새에 연연할 것이 없다.
다음은 역시 19일 제주에 내리는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다. 그에게 북한의 핵이 제기하고 있는 위협을 분명하게 말하고,북한에 핵시설과 핵기술을 제공한 사실에 상응한 행동을 요구해야 한다. 그가 되풀이 할 한반도 비핵화론이나 듣는데 그쳐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근래 노대통령은 고르바초프와의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회고하면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현지에서 만난 어떤사람이,소련과 가까운 알래스카 사람들은,냉전중 밤에도 한눈을 뜨고 잤다는 말을 하길래 『우리는 그 사이 두눈을 뜨고 잤으나,한·소관계가 튼 이제는 한눈을 뜨고 잘 수가 있겠소』 했다는 것이다.
그 말대로 우리 주변정세는 대견스런 변화를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위협이 커지고 있는 동안,우리는 결코 두 눈을 감고 잠을 잘 수 없을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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